제목 항일독립운동가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3.14 01:56
                                               항일독립운동가 백포 서일의 생애와 사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1. 백포 서일의 생애
   서일(徐一)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서재운(徐在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기학(夔學)이고 초명(初名)은 정학(正學)이며, 도호는(道號)는 백포(白圃), 당호(堂號)는 삼혜당(三兮堂)이며  본관(本貫)은  이천으로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36세 손이다.
   ‘서일은 키가 5尺 6寸 정도로서 메마르고 얼굴이 길어서 여윈 얼굴이나 코는 높고 산발(散髮)을 하고 색은 검으며, 길이 1尺 정도의  목면제(木綿製)  가방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 서일은 1890년 10세 때부터 고향인 함경도 경원에서 학음(鶴陰) 김노규(金魯奎,?~1905)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당시로 보면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주역 을 공부하였다. 서일을 가르쳤던 김노규는 함 경북도 경원에서 이름 있는 지식인으로 민족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한 선비였다. 그 후 서일은 1900년 초부터 다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함경북도 경성군 소재 이운협(李雲協, 1873~1910)이 설립한 함일실업학교(咸一實業學校)의 전신(前身)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1902년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백포는 1911년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汪淸縣) 덕원리에 자리잡았다. 백포는 그 곳에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여 청년동지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에 진력하였다. 마침내 백포는 1911년 3월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대종교인인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백순(白純) 등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1911년 7월경 백포는 홍암(弘巖)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삼일신고'와 '신리대전'등 대종교 경전을 탐독하였다.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3년 10월에는 참교(參敎)로 피선되어 시교사를 맡아보았다. 1916년 4월 백포는 상교(尙敎)로 승질하여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으로 활동, 교통(敎統) 계승자 물망에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대종교의 최고 교질(敎秩)인 사교(司
敎)로 초승(超陞)되어 교통전수의 천궁영선식(天宮靈選式)을 행할 정도로 교중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해 음력 8월 보름날 대종사가 갑자기 조천(朝天)하자 백포는 홍암을 추모하는 '가경가'(嘉慶歌)를 짓고, '동도본사애사'(東道本司哀辭)를 바치기도 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5월에 백포는 이미 조직된 중광단을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를 순한글신문을 발간, 배포하여 동포들의 독립의식을 고양하면서, 독립을 얻기위한 대가는 오직 혈전(血戰) 뿐이라는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고취시켰다. 나아가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을  위한 준비로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총 1,037명의 명부에 등록된 대원을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설치하고, 당시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에 소속돼 있던 군사전략가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박성태 등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게 함으로써, 임전태세의 역량을 갖춘 독립군 편성을 마무리지었다. 그해 10월에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이 때  대한군정부를 창립한 주요인물은 백포를 비롯하여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계화, 이범석 등이었다. 이 대한군정부는 이 해 12월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고쳤는데, 당시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대칭하여 흔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총재에  백포가 취임하였고, 부총재에 현천묵, 사단장에 김규식, 연성대장에 이범석, 사관연성소 소장에 김좌진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 잣덕에 있었다. 부속기관인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에서는 1920년에 제 1기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에 편입시켰다. 바로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었던 4일간의 청산리전투에서 중견역량을 담당하여 혁혁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였으며,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 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양성된 정규병력만 1,500여 명이었으며,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의 대승리후 전개된 일제의 대토벌작전을 피해 병력은 북만주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세로 인해 군단병력은 1921년 1월 소련 연해주로 이동하였고, 이때 백포는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당벽진에 남아 경제적 뒷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적군(赤軍)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 수백명이 야간에 내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여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났다. 이에 좌절을 느낀 백포는 같은 해 8월 26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아 그가 머물고 있던 마을 주민들까지 참화를 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백포는 독립군 총수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다음날인 8월 27일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뒷산 숲속에서 대종교 최고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다가, 1922년 8월 15일 서이도본사 주최로 1주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23년 1월에 대종교총부는 그의 묘소에 원방각(圓方角) 나무배자를 건립하였고,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로 쓰도록 결정했다. 이후 1924년 3월 16일 백포에게 종사철형(宗師哲兄)의 교질을 추숭(追崇)하였다. 1927년 봄에 그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현 청호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청호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한 대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정부는 백포 서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백포 서일의 사상
   백포 서일은 홍암 나철의 제자로 무장독립운동의 위대한 영도자였다. 그는 탁월한 조 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고,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이론가였다. 특히 한 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佛書)와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열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서일은 삼일철학(三一哲學)을 체계화한 사상가였다. 그는《회삼경》,《삼일신고강의》,《구변도설》,《진리도설》,《오대종지강연》,《삼문일답》등을 집필했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회삼경은 서일의 삼일사상이 가장 종합적으로 체계화된 글”이라며 “유불선 삼교의 원리인 불교의 묘법, 유교의 역학, 도교의 현리(玄理)를 종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조선학회 복기대 회장은 “백포 서일은 한민족주의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겼다.”라며 “당시 암울했던 대일항쟁에 그 길을 열었던 지도자”라고 말했다.
  서일은 ‘단군대황조’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홍익인간’이 행동강령이 되는 ‘단군민족주의’를 실천하였다. 무엇보다도 간도일대에 있던 모든 정파, 종파를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만들고자 하였고, 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서일이 설계한 단군민족정신은 오늘날 한반도의 분단정세를 풀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남과 북이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역사경험주의를 근거로 하여 통일을 해야 하는데 그 역사경험주의 뿌리는 바로 고조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북이 모두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서일이 주장하였던 단군민족주의의 근간은 바로 ‘홍익인간’ 정신이다. 이 홍익인간 정신은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적용되는 평화정신인 것이다.
                                                                <참고문헌>
    1. 정길영,「백포 서일 연구 - 대일항쟁을 중심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박사학위논문, 2013.1.
    2. 윤관동, “대일항쟁의 정신적 지주, 백포 서일을 아십니까?”, 코리안 스피릿, 2013.4.24일자.
                                                           <필자 신상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60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태그 782

시청자 게시판

2,117개(68/106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45777 2018.04.12
776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2015년 7월 등재 확실 localhi 2287 2015.05.07
775 친일파 청산문제 localhi 1913 2015.05.06
774 『삼국사기』는『삼국사』로 바로 잡아야 한다 localhi 1739 2015.05.05
773 아이, 며느리도 존중한 동학사상 localhi 1933 2015.05.03
772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선 재야 민중사학자 이이화 선생 localhi 2066 2015.05.02
771 증평 구암서원 터 발굴 조사 localhi 2639 2015.04.29
770 고조선 땅 남한 제외는 식민사학에 근거 localhi 2009 2015.04.28
769 별이 깜빡깜빡거리는 현상의 의미 상생택국 1787 2015.04.25
768 ‘원본사고 이론’으로 유명한 무속학자 김태곤 localhi 2117 2015.04.23
767 고대 한국 문명이 동서양 문명의 모체 - 이병도와 신석호가 우리 고대사 localhi 1921 2015.04.21
766 대전광역시 서구 유천동 단군당 localhi 2599 2015.04.20
765 한민족 상고사 그림전시회를 경축하며 localhi 2261 2015.04.19
764 신동아파밀리에 아파트단지 정문 입구 치우천왕 조각상 눈길 localhi 2268 2015.04.18
763 한국문학번역원 통폐합 반대 localhi 2108 2015.04.16
762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 말살 localhi 2480 2015.04.14
761 한국 역사교육 수난사 고찰 localhi 1716 2015.04.12
760 일월오봉도의 유형 연구 localhi 3181 2015.04.11
759 한민족의 조종이신 태호복희씨에 관한 영상은 있는데 염제신농씨에 관한 영상 상생택국 2237 2015.04.09
758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 발족을 경축하며 localhi 1791 2015.04.09
757 동양철학박사 이찬구 선생의 홍익통일국가론 localhi 2850 201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