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 고장 대전의 지명 유래와 발전상 고찰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5.16 03:40
                          우리 고장 대전의 지명 유래와 발전상 고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충청지역의 지명 연구는 일제시대인 1935년에 삼품창영(三品彰英)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백제 지명인 공주의 고지명인 ‘구마나리(久麻那利)’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충청지역 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는 1943년에 지헌영의「계족산 일대 지명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후에는 지헌영, 김선기, 조재훈, 도수희, 유창균, 김주원, 정동화 Sasse 등에 의해 충청지역 지명 연구가 이루어졌다.  
   민족종교인 증산도(甑山道)는 민족의 혼과 역사를 바로 찾는 운동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태전지명찾기 서명운동〉을 전개한 결과 약 75만 명의 시민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행정 편의상 지금도 대전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증산도 신도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한밭대로 1133(중리동 409-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증산도 본부 홈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전(大田)의 본래 지명은 ‘태전’(太田)이다. 대전은 오래전부터 한밭, 콩밭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어 한밭, 콩이 많이 나서 콩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명인 한밭, 콩밭을 모두 아우르는 한자어로 표기하면 태전(太田)이 된다.
   역사적으로 태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太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 모든 공식자료(대한제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공식지명으로 태전(太田)이 기재되었다.
   그러던 태전이 ‘대전’으로 그 지명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대전’은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만들어낸 오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일본인 다나카 레즈이(田中麗水)가 지은『대전발전지』에 그 내막이 나온다. 한일병합이 되기 한해 전인 1909년 1월의 일이다.
   당시 순종황제를 호종하여 태전을 지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이곳 주변의 수려한 산세와 이름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아랫사람에게 태전(太田)의 태(太) 자에 점을 뺀 대전(大田)이라 부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한 것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함이다. 금수강산 곳곳에 혈(穴) 자리에다 쇠말뚝을 박거나 경복궁 앞에 ‘日’자 모양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한밭과 콩밭이라고 불려지던 명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지명은 태전(太田) 밖에 없다.『설문해자』를 보면 大 자는 사람이 두 팔과 두 발을 쫙 펴고 서 있는 형상이며, 太 자의 점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창조의 기능을 담당하는 생식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太는 大와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太는 창조의 상징이다. 따라서 시작한다(太初, 太始, 太祖 등)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至尊)하다는 의미(太皇帝, 太上皇 등)도 담고 있다.>
  한편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 발간된 주요 언론과 정기 간행물에서도 대전광역시의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은 원래 ‘태전(太田’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대전’으로 바뀐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학계는 물론 언론계, 종교계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필자 역시 그 당시 그런 움직임을 알고, 나름대로 대전 지명의 유래에 대해 고찰하고, 증산도 신도들이 목척교에서 전개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전’을 ‘태전’으로 변경하려면 행정 인력과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가뜩이나 어려운 지방 행정과 재정에 많은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어 지명은 대전으로 그대로 사용하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너무나 분주하게 생활하다 보니 대전 지명에 대한 논쟁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요즈음 <대전 문학 600년사>를 집필하다가 필요에 의해 다시 대전 지명에 대해 고찰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2015년 4월 말에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한 가양도서관에서 대전 지명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10년 2월에 발간한『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뻐서 얼른 대전 지명 유래를 찾아보니 내가 20여 년 전에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답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 감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제가 원래 사용하던 ‘태전’이란 지명을 ‘대전’으로 고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제는 ‘태전’이란 지명을 선호하였으나 ‘대전’이란 지명에 밀려 ‘태전’이란 지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일본에서도 ‘태전’이라는 지명이 자주 사용되었고, 일제가 관보에 게재할 때도 태전역(1904), 태전우편수취소(1905), 태전경무분소(1906), 태전우체국(1908), 태전경찰서(1910) 등 ‘태전’이란 지명을 실제로 많이 사용하였다. 둘째로 우리의 옛 지명을 보면 한산(韓山) → 대산(大山), 한여흘 → 대탄(大灘), 한내 → 대천(大川), 한비 → 대우(大雨), 한실 → 대곡(大谷), 대밭 → 죽전(竹田), 쑥밭 → 애전(艾田), 삼밭개 → 삼전도(三田渡) 등을 고찰해 볼 때 대전은 ‘한밭’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로 대전 지명은『동국여지승람』(1486) 공주목조에 “대전천(大田川)-유성현 동쪽 25리에 있으니 전라도 금산군 경계에서 나왔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그 외에도『호서읍지』,『임원경제지』, 고산자 김정호의『대동지지』와 여러 문집 등 곳곳에 ‘대전’이라고 나오고 있어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대(大)와 태(泰)가 같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어느 글로 표기하든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일제시대의 관보에는 ’대전‘과 ’ 태전‘이 혼용되었던 것이다.
   대전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남쪽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다. 대전은 동쪽의 식장산, 서쪽의 구봉산, 남쪽의 보문산, 북쪽의 계족산(원명 봉황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들에 둘러 쌓인 분지형태의 도시다. 서북쪽 공주와의 경계에는 금병산, 우산봉, 도덕봉, 백운봉 등 계룡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계가 논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동쪽 청원군과의 경계에는 대청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산지 사이를 갑천과 대전천, 유등천이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들면서 주변에 넓은 평야를 형성시켰다.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순하여 정말 큰 도시가 형성될 땅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큰 읍으로 성장하지 못하다가 10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은 지리적으로 산태극 수태극 형상을 이루고 있다. 대전을 중심으로 산맥과 강줄기가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것처럼 태극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은 금강의 수원지로서 그 물길이 대전과 계룡산을 돌아 서해로 흘러 수(水)태극을 이루고,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마이산(馬耳山)으로 해서 대둔산(大屯山), 계룡산(鷄龍山)으로 이어지는 맥은 산(山)태극의 형세를 이룬다.
   지리학상으로 볼 때 지구의 혈(穴)이 바로 남북한을 통틀어 대한민국이고, 이 대한민국 중에서도 오직 대전이 자리한 중부지방만이 그렇게 크게 역(逆)을 했다. 이곳 태전이 본래 지구의 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시대에 대전(大田)은 공주목 유성현, 회덕현, 진잠현에 속했다.
   대전이 자연 마을을 벗어나 국가 통계의 기초 단위로서 등장한 것은 1895년인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행정리로의 개편 때가 처음이다.  
   그리하여 100여 년 전만 해도 대전은 한가로운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전을 큰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는 대전역이 들어서면서부터다. 1905년 경부선 개통에 맞추어 대전역이 세워지면서 하루아침에 도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부선에 이어 1914년 대전을 기점으로 하는 호남선까지 개통됨으로써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굳혔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까지 옮겨오게 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천도(1950.6.28-7.14)를 한 적도 있다.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대전은 전후 복구와 급속한 인구 증가로 중부지방의 행정·문화·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불타서 1958년에 새로 지은 대전역과 충남도청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중앙로는 대전 시가지 발달의 중심이 되어왔다.
   1974년부터 건설하여 자리 잡은 대덕연구단지는 한국과학기술의 중심지로, 대전이 과학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에는 정부대전청사가 들어섬으로써 대전은 행정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대전은 한국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도시로 손꼽힌다.
   대전은 이제 더 이상 충청권의 지방도시가 아니다. 대전은 현재 인구 1만이 넘는 정부대전청사(제3정부청사, 통계청·조달청을 비롯한 10개의 정부기관)가 들어와 있다(1998년 이전). 얼마 전 세종시의 원안 관철로 이제 대전은 제2의 행정수도로서 기반을 닦아나가고 있다. 오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정부과천청사(제2정부청사, 7개 정부부처와 10개 공공기관)가 세종시로 옮겨온다. 세종시를 곁에 둔 대전은 이제 대한민국의 중핵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대전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임시수도가 된 적이 있다. 1970년대 서울인구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중앙정부 부처를 옮길 것을 골자로 하는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대전 부근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기도 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새 도읍지 후보지로 대전 근방을 지목했었다(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 아래 새 서울을 찾아 나섰던 이성계는 중도에 마음을 바꾸어 한양을 수도로 확정). 또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서정개혁을 위한 여러 정책을 펴면서 계룡산 아래로 도읍을 옮기려는 마음을 먹고 이를 시행하려다 그만뒀다는 흔적과 개인기록도 있다. 이것이 실행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먼 훗날 대전을 미래의 새 서울로 쓰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대전광역시는 한국의 중앙에 위치하는 광역시로 2014년 12월 말 현재로 592,508세대에 인구수가 1,531,809명(남자 766,497명, 여자 765,312명)에 달해 전국 5대 도시에 속한다.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여 교통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정부 대전청사가 위치하여 행정도시로, 대덕연구단지와 엑스포과학공원이 위치하여 과학기술도시로, 자운대가 위치하여 군사도시로도 유명하다.
   대전광역시는 세계적인 대도시로 면적이 539.97 km²에 달한다. 그리고 행정 구역이 동구 · 서구 · 중구 · 유성구 · 대덕구 등 5개 구청, 177개 법정동과 7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전광역시는 바로 이웃한 곳에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참고 문헌>
   1. 田中麗水,『대전발전지』(영인본), 경인문화사, 2000.
   2. 김경수,『한국지명유래집-충청편』,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2.
   3. 증산도와 대전광역시 홈페이지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작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61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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