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백강전투의 의의와 경과와 영향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7.03 02:45
                                                 백강전투의 의의와 경과와 영향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백강전투의 의의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663년 8월에 한반도의 백강(현재의 금강 부근)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 일본 측에서는 '백촌강 전투'로 표기한다.
백강전투는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그리고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2. 백강전투의 경과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3. 백촌강 전투의 영향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김용운,『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맥스미디어, 2014.12.
    2. “백강전투”, 네이버 위키백과, 2015.7.2.
    3. 허문명, “나당연합군에 패한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동아일보, 2015.7.2일자. A2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61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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