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수암 권상하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8.10 02:44
                                                   수암 권상하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1641년 충북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서 사헌부의 벼슬인 정삼품의 집의(執義)를 받은 권격권격(權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자인 권상명, 권상유(權尙游)의 형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 ? 한수재(寒水齋)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일찍부터 남달리 뛰어난 재주를 보여 시남(市南) 유계(兪棨)가 그를 칭찬하였다. 그 뒤 그는 어린 나이에 유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의 국장기간 중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이 3년복이냐 기년복이냐를 놓고 복제문제가 발생하여 스승 송시열이 남인에 의해 덕원부(德源府)로 귀양가게 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를 다짐하였다.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 진사로 수학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한 뒤 예송 논쟁과 남인-서인간의 갈등을 피해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부모의 3년상을 마친 뒤 송시열을 따라 화양(華陽)에서 사서(四書), 계몽(啓蒙), 계사(繫辭), 홍범(洪範) 내편(內篇)을 강론하였다.
    그 뒤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중 1668년 스승 송시열이 남인(南人) 좌의정 허적(許積), 남인 거두 윤휴, 외척 김석주 등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스승 송시열의 상소를 받지 말고 유임시킬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1672년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다. 그 뒤 스승 송준길의 3년상을 마쳤다. 1674년 예송 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송시열의 죄를 묻는 남인유생들의 상소가 계속되자, 권상하는 스승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 뒤 낙향, 제자들을 모아 산속에 들어가서 유학을 가르쳤다.
    1674년(숙종 즉위)에는 이전에 1659년(효종 10)의 1차 예송 당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스승 송시열이 삭탈관직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한편, 남인이 정권을 전단하자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후 청풍(淸風)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정호와 주희의 서적을 교정, 번역 보급하였다. 스승 송시열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에게도 사자소학과 사서삼경의 한글번역본을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송시열의 제자들 가운데는 민정중, 민시중, 김수항, 민유중, 김창협(金昌協), 김익훈, 송규렴, 윤증(尹拯) 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권상하는 윤증이 송시열과 결별한 이후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한편 송시열의 문하에서 함께 배운 윤증(尹拯)이 회니문제와 윤선거의 제사에 윤휴(尹?)의 조문을 받아들인 일로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도 그와 교류하였으나, 윤선거의 묘비문(墓碑文) 문제로 윤증과 송시열이 갈라서자 그는 이를 미워하여 윤증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윤증을 적으로 여기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주자 가례를 주장한 스승의 이론을 신봉하여 받들었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받으러 상륙하자 송시열의 다른 문도들을 이끌고 광양으로 내려가 그를 맞이하였다. 이후 스승 송시열의 한성부로 가는 길을 도보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권상하는 그 곳까지 가서 스승인 송시열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선물로 물려받았으며, 그의 유지를 계승하였다.
    송시열은 수제자인 권상하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그에게 결별을 고하는 편지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곧을 직(直)’ 자의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 누누이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그에게 남겨주었다.
    그 뒤 송시열의 상에 3년 복을 입고 3년 상을 마쳤다. 그리고 권상하는 백호 윤휴와 명재 윤증을 이단이라며 공격하였고,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나라의 신종, 의종 등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는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향하여 임진왜란 때 파병을 한 것을 추모하였고, 명나라 의종(毅宗) 숭정제를 추가 배향하였다. 또한 숙종의 특명을 받고 명나라의 임진왜란 파병을 감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장병들의 넋을 기렸다.
    당시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스승인 송시열의 논적인 허목과 윤휴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과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주로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선배 유학자들인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으로부터 제기되던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연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여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 뒤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어 출사한 뒤 순룽 참봉(順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莩事),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공조 정랑(工曹正郞) 등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탁되었다가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냈다. 송시열과 김수항의 사후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의 묘호를 회복하고 복권시킬 것과 사육신, 생육신 외에도 단종을 위해 순절한 신하들의 충의를 현창하고 포상할 것을 여러 번 상소하였다.
    1694년의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였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 뒤 1698년(숙종 24년)에 특별히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승진되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세자시강원찬선(贊善)과 성균관좨주를 겸하였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취선당 저주 사건으로 무고의 옥이 터져서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였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703년 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1705년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이 되고 이후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나 모두 사직하였다. 1712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717년 의정부좌찬성으로 특진하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특히 스승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키자, 그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尹?),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 등 8백 여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로 자칭타칭 송시열의 적통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물러나 황강(黃江)에서 은거하였다.
    이단하(李端夏), 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하였으며 자신의 문하에서도 수백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그 중 이름이 알려진 제자로는 한원진, 이간, 윤봉구(尹鳳九), 이이근(李?根), 현상벽(玄尙璧),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성만징(成晩徵) 등인데 이들을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 부른다.
    사계 박세당(朴世堂)이 주자(朱子)의 사서육경에 달은 주석 대신 독자적인 주석을 달자 이를 공격, 그와 논쟁하였다. 또한 이경석의 묘갈명에서 송시열을 불상인이라고 비평한 박세당을 성토하고, 노론언관들을 시켜 박세당에 대한 공격 여론을 주도한다. 한편 이경석의 비석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가운데 이경석의 손자와 갈등하기도 했다.
    수암 권상하의 학통은 외암 이간(巍巖 李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홍계희, 도암 이재, 임성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호론파와 낙론파로 양분되어 주류를 차지하지 못하고 외척계열 노론에게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이(李珥)를 연원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그 보다 한단계 발전된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 냈다. 그의 강문8학사 중에서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 벌어진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두고 ‘인(人)과 물(物)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지지하고, 이간의 ‘인과 물의 성이 동일하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반대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로써 기호학파의 학술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호론(湖論)과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으로 양분되는 양상을 맞았던 것이다.
    수암 권상하는 1721년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하였고 상복(喪服)을 입은 문인(門人)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의 시신은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에 안장되었고 그의 묘소 앞에는 1717년 사망한 아들 권욱의 묘소가 있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정읍의 고암서원(考巖書院), 보은의 산앙사(山仰祠),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 예산의 집성사(集成祠), 송화의 영당(影堂) 등에 배향되었다. 기호학파로는 송준길과 함께 영남 지역의 사당에 배향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망 직후 1721년 노론의 영수로 지목되어 소론 신치운(申致雲)의 상소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복관되고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으며, 그해 시장(諡狀)을 심의하지 않고 바로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
    수암 권상하는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문체가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부인은 군수 이중휘(李重輝)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문집에《한수재집(寒水齋集)》,《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1979년 그의 저서 《한수재집》이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1. “권상하”, 네이버 위키백과, 2015.8.2.
    2. 김기, “황강의 유학자 수암 권상하”, 금강일보, 2013.7.10일자. 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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