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 진보경제학의 태두 김수행 박사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8.04 03:52

           한국 진보경제학의 태두 김수행 박사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한국의 진보적 정치경제학을 개척한 김수행(金秀行, 1942년 10월 24일 ~ 2015년 7월 31일) 경제학 박사는 1942년 10월 24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귀국하여 대구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경북중학교와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대 상대(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 동아리 ‘경우회’에서 활동하며 ‘정치경제학 비판’에 눈을 떴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 고(故)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경우회 선후배들이다. 대학 졸업 후 1972년부터 1975년까지 6년간 외환은행 런던지점에서 근무하던 중 1974년 무렵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석유 파동을 겪으며 경제 공황에 관심을 갖고 마르크스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런던행을 도와준 인물 중에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이름이 나온다. 고인이 외환은행 조사부 근무시절 재무부에 파견을 갔는데 당시 이재국장이 이용만씨였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됐던 고인은 이씨의 도움으로 런던행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1982년 런던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의 공황 이론>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데 학위 논문 제목에서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를 뺐다(박사학위 논문 제목 : Theories of economic crises : a critical appraisal of some Japanese and European reformulation). 당시 『자본론』이 금서였던 국내로 돌아올 상황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김수행은 한국외환은행 런던지점 대리, 한신대학교 무역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일했으며, 2008년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언론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201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학 경제학과 초빙교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세계경제연구소 소장, 한국경제발전학회 회장, 한국사회경제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수행 교수는 매우 소탈하고 강직한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멋진 표현이나 현학적 표현을 멀리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에두르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어법과 톤이 높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인해 전형적인 경상도 ‘상남자’로 보이기 쉬웠겠으나, 사실은 몸매만큼이나 넉넉하게 품이 넓고 따뜻한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 후배나 제자들, 그리고 사회운동가들을 도울 일이 있을 때면, 자상하고 헌신적으로 도우면서도 이런 일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그리고 남의 입을 통해서야 교수님의 미담을 듣게 되는 사례가 많았다. 인간관계에서는 무엇보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적 면모를 보이셨다. 당신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사람들을 폭넓게 받아들이셨고 이런저런 이유로 당신과 멀어지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는 ‘쿨’한 분이셨다.
   1960년대에는 학문이 개방적인 미국에서 조차도 진보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대학에서 교수로 자리잡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폴배런이 1964년 5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미국 유일의 마르크스 경제학 정교수였는데, 그마저도 주류경제학자들로 둘러싸인 명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 교수진 내에서 유일한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산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분단국가이자 반공냉전국가인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기간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공식적 학계가 아니라 대학 운동권 학생들의 지하서클 등에서 비밀리에, 그리고 당연히 아마추어적으로 학습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마르크스 경제학을 중요한 경제학 사조이자 현대 지성사의 빠뜨릴 수 없는 유산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일에서 김수행 교수님만큼 기여하신 분을 찾기 어렵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자본론》은 공산주의’의 원전으로 치부되어 금기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자본론>이 익명으로 번역되고, 출판사 대표와 서점 주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례도 여러 건 발생했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는 식민지시대 일본이 사들인 <자본론> 독일어 원전이 잠자고 있던 야만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자본론》독일어판은 1987년 당시 농협에 다니던 대학원생 강신준(동아대 교수)씨가 익명으로 독일어 원서를 번역해 출판한 바 있다. 그런데 김수행 교수는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민주화 이후 최초로 1991년에 그동안 금서로 묶여 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영문판을 완역해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영문판 완역 출간은 한국이 야만의 시대를 겨우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김수행 교수는 정치경제학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 심지어는 학내민주화나 사회민주화를 외치는 거리 곳곳에서 일인시위까지 불사하던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자였다.  
   김형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마르스크 경제학 내에도 여러 흐름이 있는데 김수행 교수는『자본론』에 원론적으로 접근해 그 이론으로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김수행 교수가 저술한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이라 읽지 못하던 《자본론》이 민주주의 나라인 영국에서는 책방에서 쉽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다고 한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김수행 교수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일에 천착했다. 부인에게 마르크스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는 방법을 골몰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태우 정부 당시 김수행 박사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하였는데, 이는 1990년 10월 4일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 수사에 협조해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다 민주화 운동으로 대학 재단과 갈등을 빚어 1987년 고 정운영 교수와 동반 사직했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불온사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해 대학에 자리잡기는커녕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수행 박사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가치, 학문적 균형 등을 강조하며 후학을 독려했다.
   1988년 당시 민주화 요구가 한창이던 시절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부 및 대학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경제학 교수를 영입하라는 운동이 일어나, 대자보, 서명운동, 집회, 수업거부, 토론회 등이 진행되었고, 일부 교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국 1989년 1학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최초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김수행 박사가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김수행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식 학과 과목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은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대중적 저술과 대학 강의, 그리고 대중 강연 등을 통해 마르크스 경제학의 보급과 대중화에 그 누구보다 많이 기여했다. 또한 수십권의 저서와 역서, 그리고 100편에 육박하는 학술논문이 그분의 중단 없는 학문적 정진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젊은 시절에 연구에 매진하다가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안정되면서 연구에서 멀어져 간 데 반해, 김수행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연구 실적을 더 많이 내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수행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박영호· 정운영 교수와 함께 대한민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1세대에 속한다. 2008년 2월 29일 정년퇴임 때 서울대학교의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그의 퇴임 후 서울대학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를 교수로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가 대학원생들의 요구로 교수 구인 공고에 '(정치경제학 포함)'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그러나 그의 후임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아니고 일반 경제학자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연구의 맥이 단절된 것은 한국 경제학의 조화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안타까운 일이다.  
    김수행 교수는 소련-동유럽, 중국, 북한 등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 또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마르크스주의의 구현물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중대한 이탈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향한 미래 사회는 개인의 기본적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고, 사회경제적 평등이 달성되며, 개인 간의 협력과 연대에 기초하여 개인들의 자아실현이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1990년대 초의 소련-동구권 체제 전환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서 신념을 견지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
   김수행 교수는 진보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지만 기독교인으로서, 교회 집사를 지냈다. 2008년 5월 19일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래스 신부(Rev.Alister Mcgrath) 초청강좌 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인데, 1961년에 기독교를 처음 접했다. 그동안 종교를 빙자한 분쟁이 많았음을 생각한다면, 신학 연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며, 자신의 종교관을 밝힌 바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자본론》,《국부론 (상)-(하)》,《청소년을 위한 자본론》,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자본론 공부》, 《세계대공황》등이 있다. 2009년 제4회 임창순상을 수상했다.
   김수행 교수는 2015년 1학기 하기 방학을 이용해 아들을 만나러 지난 7월 24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방미 중  2015년 7월 31일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1. “김수행”, 네이버 위키백과, 2015.8.3.
   2. 김여란·박병률, “ ‘자본론’ 첫 완역한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 교수 타계”, 경향신문, 2015.8.3일자. 2면.
   3. 김효정, “국내 제도권에 마르크스 경제학 기초 놓은 1세대 이론자”, 중앙일보, 2015.8.3일자. 24면.
   4. 류동민, “홀로 ‘금기’를 깬 당당한 그 목소리…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경향신문, 205.8.4일자. 19면.
   5. 신정원, “마르크스주의 신념 꿋꿋이 지켜낸 지시인의 전형”, 한겨레신문, 2015.8.4일자. 27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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