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대한민국 인구조사의 역사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9.15 02:41
                                      대한민국 인구조사의 역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인구조사는 유사 이래 모든 국가조직의 관심사항이었다. 영토 내 거주하는 정확한 인구수를 알아야 세금을 부과하고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5년 9월 현재 통계청의 승인을 받은 통계는 모두 939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통계는 인구통계다. 모든 통계조사는 인구통계로부터 시작된다. 어디에, 얼마나 사는지, 연령과 성별은 어떻게 되는지 등 인구통계는 표본통계를 만들기 위한 모집단을 제공한다. 인구통계의 백미가 인구주택총조사다. 5000만 국민을 일일이 찾아가 답변을 받아 내는 전수조사이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인구주택총조사는 막대한 비용과 인원이 투입되는 국가적 행사다.
   인구조사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된 데는『인구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인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공이 크다. 맬서스는 1798년『인구론』을 통해 급속한 인구증가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인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국은 1801년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네덜란드, 프랑스 등도 이즈음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구조사에 들어갔다. 최초의 근대적인 인구조사는 1790년 미국이 실시한 조사로 본다. 각국이 잇달아 인구조사에 나서면서 1885년 국제통계협회(ISI)는 1900년 같은 날을 기준으로 모든 회원국이 공통으로 총조사를 실시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끝자리가 0 또는 5로 끝나는 해에 5년마다 인구총조사를 하는 방식이 정착됐다. 유엔 통계처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전 세계 214개국에서 인구총조사를 실시했고, 전 세계 인구의 93%가 조사됐다.
   우리나라 인구조사의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인구조사가 시행됐고, 명칭은 ‘호구조사’였다. 납세와 징병 목적의 조사였으니 ‘호구조사’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호구조사는 조사대상이 한정됐다. 세금 납부와 징병의 의무가 없는 여자와 아동, 노비 등은 조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도 국가운영을 위해 호구조사에 공을 많이 들였다. 조선 초기인 1406년 태종은 전국적인 호구조사와 호패법을 시행한다. 새로 건국한 국가로서 국가중요자원인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태종실록>을 보면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경상도로 4만8993호에 9만8915명이 거주했다. 이어 서북면(평안도)에 3만3890호, 6만2321명이 거주했다. 세종은 한성에 대한 호구조사를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1435년 한양 호구는 성 안은 1만9552호, 성 밖 10리는 2339호로 집계됐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통해 호구조사는 3년마다 하도록 못 박았다.
   조선의 호구조사는 16세 이상 장정이 조사대상이었다. 10세 이하의 아동, 노비, 유랑민들은 제외됐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약 70%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토니 마이클은 <인구조사>라는 책을 통해 조선 인구는 실제 호구수의 7.95를 곱하면 10% 내외의 오차범위에서 근접한 수치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계산해 보면 조선 정조 당시 인구는 약 750만명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통계도 ‘호구조사’다. 1896년 9월1일 고종은 ‘호구조사규칙’을 공표한다. 오래된 문물제도를 버리고 근대적인 서양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갑오개혁의 일환이었다.
   호구조사규칙은 쉽게 말해 인구주택조사 시행령이다. 호구조사규칙을 보면 호적의 내용은 매년 수정하고, 거주지는 원적을 표기해야 한다. 각 가구는 호패를 붙여야 했다. 정부는 호구조사규칙이 근대 통계의 시작이라고 보고 이 규칙이 발표된 9월1일을 ‘통계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호구조사’라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가 커진 것은 일제강점기 탓이 크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이용했다. 조선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으니 호구조사에 대한 반발은 극에 달했다.
   1925년 10월1일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의미의 인구센서스를 첫 시행한다. 공식 명칭은 ‘간이 국세(國勢)조사’였다. 당초 목표는 1920년 시행이었지만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시행을 미뤘다. 한창 달궈져 있던 조선인들의 반발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1925년 조사에서 조선 인구는 1902만명으로 집계됐다. 남자가 972만6000명, 여자가 929만4000명이었다. 간이 조사를 끝낸 일본은 5년 뒤인 1930년부터는 ‘조선 국세조사’라는 명칭으로 본격적인 인구센서스를 실시했다. 이때부터 단순 인구와 가구수뿐 아니라 직업 등과 같은 경제활동사항도 묻게 된다. 1944년 조선총독부는 간이 국세조사를 실시한다. 전시 징병을 위해서였다. 당시 인구는 2512만2000명으로 집계됐다. 이 조사가 남북한을 동시에 조사한 마지막 인구센서스가 됐다.
   1948년 12월13일 대통령령으로 ‘제1회 총인구조사 시행령’이 공포된다. 통계시책으로는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정령이었다. 이듬해인 1949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첫 총인구조사에서 남한 인구는 2016만6756명으로 집계됐다. 해방 이후 해외 거주자들이 돌아오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 인구수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1955년 두 번째 총인구조사가 이뤄진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이라 간이 총조사가 시행됐다. 특이한 것은 성비다. 1949년 조사에서 남녀 성비가 102.10이지만 1955년 조사에서는 100.79로 떨어진다. 전쟁 통에 군인 등 남자들이 많이 사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직후 통계국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산하로 배치된다. 인구조사는 여전히 세금을 걷고 주민을 위한 행정을 펴는 자료로 활용됐다. 1960년 처음으로 주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면서 명칭이 ‘인구주택 국세조사’로 바뀌지만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온 국세조사의 개념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인구센서스의 의미가 확 바뀌는 것은 박정희 정권 때다.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필요했다. 1961년 정부는 통계국을 내무부에서 경제기획원 산하로 이관했다. 1963년에는 통계국의 명칭을 ‘조사통계국’으로 바꿨다. 1970년 ‘총인구 및 주택조사’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총인구 주택조사는 제반 정책 수립의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며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세조사, 센서스 등 다양하게 불리던 인구센서스는 1990년부터 ‘인구주택총조사’로 명칭이 통일됐다. 2000년대 들어 인구주택총조사는 경제통계보다는 사회통계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다. 정확한 복지·노동·주거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자료들이 많이 필요해졌다. 집이 있아파트인지 빌라인지, 빌라라면 반지하나 옥탑방은 아닌지, 자기 집이 아니라면 원래 무주택자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집을 두고 이사를 온 것인지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연도별 인구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25년 1902만 명, 1949년 2000만 명, 1970년 3100만 명, 1990년 4400만 명, 2000년 4700만 명(북한 2200만 명), 2010년 4900만 명(북한 2400만명)이다.
   2015년은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한 지 90년이 되는 해다. 1925년 근대적인 의미의 첫 인구센서스가 실시됐다. 이후 0과 5가 끝자리에 있는 해를 기준으로 매 5년마다 인구총조사가 이뤄졌다. 2015년인 올해도 인구주택총조사가 진행된다. 오는 11월1일부터 15일까지 보름간이다. 이번 인구주택총조사는 90년 만에 큰 변화를 맞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통계를 수집하지만, 전수조사가 아니다. 전수조사 항목은 주민등록부, 건축물대장 등 행정자료를 이용한다. 심층취재가 필요한 표본항목에 대해서만 방문조사를 벌인다. 대상은 전 국민의 20%인 1000만명이다.
                                               <참고문헌>
    1.  맬서스 저  이서행 역, 『인구론』, 동서문화사, 2011.08.15.  
    2. 박병률, “징세, 수탈목적 꼬치 꼬치...불순한 호구조사 통계의 꽃으로”, 경향신문, 2015.9.12. 15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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