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선생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08.24 03:22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선생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범재(凡齊) 김규흥(金奎興·1872~1936) 선생은 한국인 최초의 중국 신해혁명 참여자이자, 해외 무장 독립투쟁의 선구자였다. 그리하여 김규흥 선생은 김복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일제 기밀문서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국사교과서에 소개되지 않아 한국 국민들에게 생소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김규흥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장투쟁과 둔전병제였다. 강력한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는 둔전병제를 통해 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장소로 내몽골 포두진을 택했다. 김규흥 선생은 원하는 둔전병제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의 뜻을 이어받아 내몽골 포두진에서 둔전병제를 실시해 많은 조선인이 농사를 지으며 독립운동을 했다.
   범재 김규흥 선생은 1872년 6월 13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충북대 사학과 김호진 씨의 석사논문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 김동교(金東敎)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했었고, 현 옥천 죽향초등학교 부지는 그의 목화밭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규흥 선생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학문을 익혔다. 그러다가 큰 그릇이 되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는 고향을 떠나 상경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경성으로 상경한 그는 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데 힘을 쓰게 된다.
   김규흥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6년, 그의 할아버지가 별세하시게 된다. 그리고 5년 뒤인 1891년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김규흥은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경성에 머물며 동지를 사귀는 데에 더욱 집중하였고, 집안은 어머니와 동생에게 맡겼다.
   김규흥 선생은 도일하여 일본의 선진 문물들을 보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게 되어 자신이 태어난 곳인 충북 옥천에 죽향초등학교 전신인 진명(창명)학교를 세웠다.
   1906년, 김규흥 선생은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면서 나라를 개화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자강회에 속한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을 비롯한 이들과 자연스럽게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의 밀사로 중국에 가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일경의 감시와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자, 이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김규흥 선생은 1908년, 중국 관동으로 단신 망명하여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본명을 김복으로 변경하였다. 중국에서 그는 자신의 인맥들을 넓혀가며 중국 내에서 항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사재를 털어 가면서 망명초기의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 모일 수 있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김규흥 선생은 1911년 10월, 한국인 최초로 공화제를 주창한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혁명정부의 도독부총잠의 겸 육군소장을 역임함으로써 핵심인물 6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 되었다.
   또한 김규흥 서생은  독립운동 총 본부와도 같은 ‘동제사’라는 비밀 단체에서 독립 운동지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동제사는 1912년 7월 건립되었으며, ‘동포들이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는 뜻을 지닌 단체였다.
   1913년 김규흥 선생은 동제사를 통해 홍콩에서 최초의 한중합작 잡지인『향강』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지역 내에 박달학원을 건립하여 많은 독립지사들을 일구어 냈다. 또한 동제사의 인맥을 통해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주요 독립지사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흥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규흥은 여러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1919년 11월에 의열단이 창립되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총리 대리직을 할 것을 교섭하였으나 김규흥은 이를 거절하였다.
   3·1운동이 있은 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되었다. 김규흥 선생도 여기에 참가하였는데, 그는 김규식을 돕기 위해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김규식과 함께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열강들의 매몰찬 외면으로 인해 그들은 원하던 민족 자결주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 후, 김규흥 선생은 북경에서 박용만과 무장투쟁노선에 따른 독립 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은 ‘대조선국민국’을 조직하려 했으나 자금 문제로 인해 조직을 구성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김규흥 선생은 박용만과 함께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이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환하는 '둔전제적 독립운동'을 구상,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1922년, 박용만과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고, 당시 개점식에는 김구 선생도 참석했다. 흥화실업은행은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을 뿐, 사실은 대일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규흥 선생은 조선,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 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고 나중에는 내몽골도 이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북경과 만주 지역의 토지를 사고, 동지들을 모아 경작하게 하면서 각 군사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1923년, 주식금을 모으고자 했던 계획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목표액 10만엔의 1/10밖에 모금하지 못하는 등 가시밭길 시작이었다. 김규흥 선생은 이때 고향 옥천에 손을 내밀어, 죽향초등학교 앞에 남은 옥답인 전답을 팔아 중국으로 송금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김규홍 선생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김규흥 선생은 손문, 진기미, 진형명 등 중국의 혁명세력들과 박은식, 신규식, 여운형 등 한국의 항일독립지사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중국 내에서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애석하게도 범재 김규흥 선생은 1936년 8월 16일, 한인 애국단이 조직된 지 5년 만에  천진에서 이질로 작고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국내로 운구돼 현재 대전 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범재 김규흥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일하여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 1TV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2015년 8월 20일 밤 11시 40분에 ‘발굴 추적!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이란 제목으로 범재 김규흥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전 과정을 특집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이제는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충북 옥천읍 향수 3길에 범재 김규홍 선생 생가가 지금도 춘추민속관(春秋民俗館)으로 남아 한옥 체험 숙박시설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김규홍 선생 생가 문향헌(聞香軒)은 1760년에 건립된 전통한옥으로 우국지사 오상규 선생이 살던 유서 깊은 곳이다. 문향헌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전국 한옥 30선에 이름을 올린 명품고택이다. 문향원 왼쪽 벽에는 독립운동가 김규홍 선생의 사진과 독립운동 관련 신문기사가 게시되어 있다. 문향헌 옆 넓은 공터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우뚝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는데, 수령이 무려 300년이 넘는 고목이라고 한다. 한편 괴정헌(槐庭軒)에는 구한말 홍선대원군이 방문한 적이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사령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고 박정희 대통령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 댁을 방문할 시에는 수행원 숙소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역사가 깃든 곳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1. 범재기념사업회 김상철?김상구,『범재 김규흥과 3·1혁명』, 이담북스, 2010.2.19.
   2. 김호진,「凡齋 金奎興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 충북대 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3. 조혁연, “김규흥, 망명중에도 고향땅 팔아 독립운동”, 충북일보, 2014.2.24일자.
   4. 김승훈, “둔전병제로 항일 무장투쟁 선도한 김규흥 장군 KBS 1TV ‘발굴 추적!… 김규흥’”, 서울신문, 2015.8.20일자. 24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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