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해월 최시형의 생애와 생명존중 사랑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10.11 01:52
                                              해월 최시형의 생애와 생명존중 사랑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최시형의 생애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순조 27s년인 1827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다.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 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
   1861년 11월 최제우가 호남 쪽으로 피신한 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몸에 익히기 위해 보인 정성과 노력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이 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이처럼 교세의 재건이 이루어지다가 1871년(고종 8) 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李弼濟)가 최제우의 기일(忌日)인 3월 10일에 영해부(寧海府)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관헌의 추격을 피해 소백산으로 피신하면서 영월·인제·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구축하여 1878년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집회를 만들었다.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용담유사 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치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충청도·전라도관찰사에게 청원했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靑山)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向我設位)·삼경설(三敬說)·이심치심설(以心治心說)·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양천주설(養天主說)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897년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신관은 범신론적·내재적 경향을 띠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나아가 만물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인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以天食天)’으로 파악된다. 이런 신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삼경사상(三敬思想)이 도출되는데, 이는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사상이다.
   또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잘 길러나가는 것(養天主)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라는 입장도 같은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2. 해월 최시형의 생명존중 사상
   120~130여년 전, 봉건 압제의 모순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차별과 억압, 천대와 경멸, 굴종과 증오가 임계점에 이르렀던 때였다. 그런 시대를 향해 해월은 말했다.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다. 섬기고 또 또 섬기라,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또 존중하라.’
   그런데 권력은 그를 잡아 죽이려 했고, 그는 보따리 하나 메고 천지를 떠돌며 천한 이들을 섬기고 또 섬겼다.
   해월은 필사적인 아니 신출귀몰한 도망자였다. 수운에게서 도통을 전수받는 1863년부터 1898년까지였으니 무려 36년 동안이었다.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등 그가 머문 피난처는 200여 곳이나 됐다. 수운이 처형당한 뒤 그랬고, 영해작변이 실패한 뒤 그랬고, 동학농민전쟁 뒤 그랬다. 하지만 구명도생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차별 없는 세상을 열어갈 ‘길’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871년 영해작변 이후 23년간 피신하면서 해월은 혁명을 일으킬 만큼 교세를 키웠다. 차별 철폐에 대한 민중의 염원은 강했다.
   그러나 피신 생활은 곤고했다. <도원기서>는 그 일단을 이렇게 전한다. 영해작변으로 피신할 때였다. “무릎이나마 간신히 펼 수 있는 바위를 찾아 이파리를 쓸어내고 자리를 만들고, 풀을 엮어 초막을 지었다. ~마시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옴큼도 다 떨어지고, 장 몇 술도 비어 버렸다.”
   고난 속에서 깨달음과 의지는 깊어지는 법. 용화동 시절 해월은 시천주(侍天主, 사람마다 한울을 모시고 있다) 교리를 인즉천(人卽天, 사람이 곧 한울)으로 발전시켰다. “사람은 곧 한울님이라,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사람으로써 귀천을 나누는 것은 한울님의 뜻에 어긋남이라, 일체의 귀천을 철폐하라.”
   1870년대 주요 피난처였던 영월 직동은 매봉산 백운산 두위봉 등 해발 1000m 이상 산들로 둘러싸인 벽지였다. 그곳에서 해월은 실천윤리를 확립했다. “덕으로써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순천이라면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역천이다.” “사람이 폭력과 분노로 대하거든 인자함과 용서로써 대하고, 상대가 힘과 돈으로 억누르려거든 공정과 정의로써 대하라.”
   요체는 비폭력 평화였고, 그 바탕은 사사천(事事天) 물물천(物物天), 3경(敬) 사상이었다. ‘일마다 한울을 모시는 것이요, 생명마다 한울님이니 한울을 공경하고(敬天), 사람을 공경하고(敬人), 만물을 공경하면(敬物) 세상이 화순해진다.’
   약자에 대한 섬김은 특별했다. 당대의 가장 약한 이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1884년 말, 청주 북이면 한 제자 집에 들렀을 때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베를 짜는가.” “제 아내입니다.” “누가 베를 짜는가.” “제 아내입니다.” “한울님이 베를 짜고 있느니.”
   해월은 1890년 초 <내칙>과 <내수도문>을 반포한다. “과거에는 부인을 억압했으나, 이제 부인이 도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이는 사람이 모두 어머니의 포태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다.” 어린이에 대해서는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제자 의암(천도교 3대 교주)은 스승의 뜻을 꽃으로 피웠다. 천도교는 1908년 여성전도회를 조직했고, 여성 월간지 <부인> <신여성>을 창간했다. 의암의 사위 소파 방정환은 1923년 9월부터 전국을 누비며 동화대회 등을 열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 이 땅의 여성운동과 어린이운동의 뿌리는 서구가 아니라 동학이었다.
   1894년 12월24일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한 그는 다시 험난한 피난길에 오른다. 음성 구계리, 황새말, 매산을 거쳐 강원도 인제 느릅정이에 머물며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로 장사를 겸한 포덕에 나섰다. 1년 뒤 원주 치악산 수레너미(현재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에 오두막을 짓고 머물다가 또 충주 음성 청주 상주 여주 등지를 떠돌며 제자를 길렀다.
   체포되기 1년 전인 1897년 4월5일 이천군 설성면에서 그는 전대미문의 제례법을 공식화한다. “부모의 영령은 자식에게 남아 있다.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자식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다. 평상시 식사하듯이 나를 중심으로 위와 음식을 진설하고, …부모의 유업과 유지를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다.” 벽을 향하던 제사(향벽설위)를 나를 향한 제사(향아설위)로 바꿨다. 한울을 모신 이가 중심이었다. 동서양의 다른 모든 제례와 전례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인간이 신에게 올린다.
   다시 여주 전거론으로 옮겨 머물던 중 관병의 급습을 당한다. 용케 빠져나와 양평, 홍천 등지를 거쳐 1898년 1월 송골로 피신했지만 1898년 4월5일 최시형은 추모비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원진녀 가옥에서 체포되었다. 해월은 체포될 줄 알면서도 평소처럼 새끼를 꼬면서 그를 체포하러 오는 관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해월은 한양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 혼자서는 일어서기도 힘든 큰칼을 목에 찼다. 서울 공평동 평리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오가는 동안, 나졸이 도와주는데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곤 했다. 6월2일에야 큰칼을 벗고 종로통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그런데 해월 최시형은 소수 천도교 신자들만 동학 2대 교주로 숭모할 뿐,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따르려 하지 않는다. 사후 92년이 되어서야 겨우 표석 하나 세워졌다. 실제로 1990년 4월12일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지방도로 옆 송골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졌다. 무위당 장일순이 치악산 고미술동우회원과 함께 조성한 해월 추모비였다. 상단부 오석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글이, 몸돌엔 “천지즉부모요 부모즉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라”라는 해월의 글이 무위당 글씨로 새겨졌다.
                                                           <참고문헌>
   1. 김용천 편,『해월신사의 생애와 사상』, 천도교중앙총부, 1969.
   2. 최동희ㅡ『동학의 사상과 운동』,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3. “최시형(崔時亨)”,『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10.
   4. 곽병찬, “해월 추모비와 무위당의 통곡”, 한겨레신문, 2015.10.7일자. 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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