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北한군, 남침 징후 잇단 보고 軍 수뇌부가 번번이 묵살, 왜?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8.09 03:38

                                                     "北한군, 남침 징후" 잇단 보고 軍 수뇌부가 번번이 묵살, 왜?

    “6·25 당시 육군 지도부에 통비(通匪)분자가 있었다.” 대한민국 군번 1번으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예비역 대장(2002년 작고)의 주장이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그는 1994년 '군번 1번의 외길인생'이란 자서전을 통해 열 가지 미스터리를 꼽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군 지도부에 적과 통하는 세력이 있었고, 미스터리가 열 가지나 된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열 가지 미스터리는 첫째, 일선부대의 남침 징후 보고를 군 수뇌부가 묵살 내지 무시한 점. 둘째, 전쟁 발발 코밑에 단행된 주요 지휘관 인사이동. 셋째, 전쟁 직전 대대적인 전후방 부대 교체. 넷째, 24일의 비상경계령 해제. 다섯째, 24일 전 장병의 50% 휴가 및 외출 외박. 여섯째, 24일 밤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 일곱째, 의정부 축선 병력 축차(逐次)투입. 여덟째, 국군이 반격해 북진 중이라는 허위방송. 아홉째, 한강교 조기 폭파. 열째,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 사형 조기 집행이다.

    이런 의문점에는 부분적으로 불가피성이 인정되는 측면도 있다. 국군은 유의했지만 미군이 사소하게 평가했고, 전술상 필요한 측면도 있었던 게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주장에 개인적 감정이 내재된 점도 인정된다. 그러나 국군의 해주 점령, 평양 진격, 서울 사수 등 허위방송, 한강교 조기 폭파, 최 대령 사형 조기 집행 등은 속 시원히 해명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남침 징후 보고를 묵살했다는 주장이 제일 파장이 컸다. 일선에서 여러 차례 보고가 올라왔는데도 당국이 묵살 무시했으니, 알고도 대비하지 않은 꼴이 된 것이다. 군 내부 통적(通敵)분자들의 작용이라는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

                                                 전쟁기념관으로 변한 옛 육군본부. 문창재 제공

    이런 의심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국군 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1949년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肅軍) 사업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좌익세력이 숙청되었다지만 충분했다고 볼 수는 없다. 1949년 5월 제6사단 2개 대대 집단 월북사건이 있었다. 채병덕 국군총참모장 부관 나최광(羅最纊) 중위가 군적이 없는 장교였다는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는 6·25 발생 이후 종적을 감추어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1949년 전후 잦은 삼팔선 충돌로 인한 준 전시상황에서 남침 정보를 소홀히 취급한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계통을 밟아 다 보고했고, 대통령도 보고를 받았지만 미국이 소홀히 했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라를 지킬 의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6월 25일 당일 상황만 보아도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전쟁 발발 사실이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되기까지 3시간, 대통령에게 보고되기까지는 무려 6시간이 걸렸다. 전화가 있는 시대에 이게 정상인가. 24일 저녁 육군 장교클럽 낙성식 댄스파티 술자리가 길어져 새벽 2시에 귀가했다는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은 새벽 5시 육본상황실 당직근무자 김종필(金鍾泌ㆍ총리 역임) 중위의 보고를 받고 전군 비상조치를 내렸다.

    비상시국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대령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화연락이 안 되었다. 채 총장은 보고를 받고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집에 전화부터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장관 비서에게 연락해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오전 7시께였다.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는데, 이때야 신 장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간략한 상황보고 끝에 “크게 걱정하실 것 없다”는 말을 거듭했다.

    미국이 한국 삼팔선 동정에 별 관심이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전쟁 업무는 도쿄 연합국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관장이었다. 그는 일본 천황의 목줄을 쥔 ‘살아 있는 군신(軍神)’ 같은 존재였다.

    악독하기로 유명한 독일과 일본을 차례로 물리친 미국 군대에 대항할 세력은 세상에 없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조직의 수장이었으니, 북한 공산군 동향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스미스 부대가 그랬다. 미군을 보기만 하면 혼비백산할 것으로 여겨 ‘여행 가는 기분’으로 왔다가,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둘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신생 대한민국 창군 초기의 특수 사정과 맞물린 사안이라는 게 국방부 측 설명이다. 전쟁 코앞의 대규모 지휘관 이동은 잦은 총참모장 교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초대 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은 2개 대대 월북사태에 인책되었고, 후임 채병덕은 원로 김석원(金錫元) 장군과의 불화로 물러났다.

    3대 총장 신태영(申泰英) 역시 몇 달 재임에 그쳤고, 채병덕이 재임됐다. 20개월 동안 총장이 네 차례 바뀌었으니 평균 재임 기간이 5개월이었다. 채병덕은 자기 체제를 굳힌다고 전후방 부대와 지휘관을 다 교체하고, 지휘부 인사까지 단행했다. 정보국장과 군수국장을 제외한 모든 참모와 사단장들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전군에 비상령이 내려졌다가 해제되기가 반복되었다. 1950년 4월 이후만 해도 비상령이 네 차례나 거듭되었다. “그것이 우연히도 6월 24일 해제되었을 뿐”이라는 게 국방부 측 설명이다. 그렇다면 5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북쪽에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5,6월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 말은 왜 소홀히 했던가.국방부 측은 오랜 비상기간 쌓인 장병들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농번기 일손 돕기 휴가가 필요한 때여서 비상을 해제했다고 말한다. 휴가가 오래 중단되어 남아도는 건빵 소비가 필요했고, 군량미가 달렸다고도 했다. 건빵이 남아돌고 군량미가 없었다는 말이 묘하게 오버랩 된다.

    의정부 축선 축차 투입으로 병력 소모가 컸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너지는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특히 수도사수가 걸린 문제여서 후방 병력을 급히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보여준 국군 수뇌부의 무능과 추태는 부끄러운 역사로 남았다.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하우스만 대위 증언록에 따르면, 25일 하오 의정부 전선에서 목격한 채 총장과 이형근 2사단장의 충돌은 볼썽사나웠다. 의정부 정면을 맡고 있던 3사단장 유재흥, 후방에서 증원부대로 온 2사단장 이형근이 참석한 작전회의 때였다. 채 총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포천과 연천 정면을 맡아 책임지고 공격토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이형근이 불복했다. “부대 이동이 다 안 됐고, 소규모 부대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면서, 명령을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채 총장이 권총을 뽑아 쏘려 하는 것을 유 장군이 말렸다. 이 장군은 군번 1번이고, 채 장군은 2번이어서 둘은 사사건건 으르렁거렸다.

    군과 정부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 방송을 거듭해 국민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트린 일은 전회에 지적한 대로다. 한강 조기 폭파와 최창식(崔昌植) 대령 사형 조기 집행 역시 명쾌하게 해명이 되지 않았다.

    6월 28일 새벽 2시30분에 있었던 한강다리 폭파는 150만 시민의 안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폭거였다. 국군의 주력이 아직 한강 이북에 있었고, 무기와 탄약 등 막대한 군수품이 강을 건너지 못했는데 왜 그리 성급했던가. 배를 타지 못한 장병들이 헤엄쳐 한강을 건너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자초한 꼴이었다.

    폭파 명령 발령자는 채 총장이었다. 28일 새벽 2시 적 전차가 돈암동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공병감 최 대령을 불러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하고 강을 건너갔다. 아직 몇 시간 여유가 있는 때였다. 이응준 유재흥 이형근 등 사단장들도 “국군 주력이 곧 당도하니 좀 기다려 달라”고 김백일(金白一) 참모차장에게 요청했다. 중지 명령을 전하러 메신저가 달려가는 사이 최 대령은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8월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 재판에서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총장은 폭파지시를 내린 일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실행자 최 대령에게만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사흘 만에 집행되었다. 고인의 한을 풀어달라는 유가족의 재심청구로 1964년 무죄선고가 나 결국 범인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관련자들이 다 고인이 되어 이 미스터리는 영구 미제로 묻히게 됐다

                                                                         <참고문헌>

     1. 문창재, "北, 남침 징후" 잇단 보고 軍 수뇌부가 번번이 묵살, 왜?", 한국일보., 2020.8.6일자.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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