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선물한 권총 찬 홍범도 -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홍범도. 차고 있는 권총은 레닌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기념관
레닌이 선물한 권총 찬 홍범도 -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독립운동가 홍범도. 차고 있는 권총은 레닌이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기념관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이 ‘독립 영웅’이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 때와 소련 공산당 입당 이후인 말년 행적에는 여러 의문이 따른다. 이 때문에 ‘과연 육사 생도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인물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①독립 영웅: 1920년까지 겪은 상황

1895년 강원도에서 처음 의병으로 봉기한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승리를 이끄는 등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 이 때문에 ‘19세기 의병 투쟁부터 무장 독립운동까지 장기간 활동한 독립운동가’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 큰 이견이 없다.

②자유시 참변: 볼셰비키 편에 선 것은 사실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은 독립운동 무장 투쟁 사상 가장 큰 비극이자 항일 무장 투쟁의 역량을 떨어뜨린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압박을 받던 만주의 무장 투쟁 세력은 국경을 넘어 노령(러시아령)에 집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러시아 볼셰비키(적군·赤軍)의 무장해제 압박에 응하지 않은 독립군 세력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독립운동 세력의 일원인 이르쿠츠크파가 적군과 결탁, 장갑차와 기관총을 동원해 공격한 결과였다. 그 배후에는 러시아 내 한인 무장 단체를 제거하라는 일본 쪽 요구가 있었다. 볼셰비키와 일제의 결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홍범도가 이 학살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해자인 볼셰비키 편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체포된 독립군 860여 명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홍범도는 재판 위원을 맡았다. 재판 결과 상당수 독립군이 수용소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에도 독립운동 진영에서 ‘홍범도 책임론’이 팽배해 그를 배신자로 모는가 하면 암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으려 다시 만주로 간 김좌진·이범석과는 달리, 홍범도는 볼셰비키 측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과 관련이 없고, 재판 위원으로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명망가이자 상징적 인물로서 이르쿠츠크파에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무장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있다(박환 수원대 교수).

국방부 청사 앞에 있는 홍범도 흉상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국방부는 30일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홍범도 흉상을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국방부 청사 앞에 있는 홍범도 흉상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국방부는 30일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홍범도 흉상을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③공산당 입당: 독립운동과는 멀어졌다

홍범도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면서 레닌을 만나 금화와 권총을 선물받았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홍범도를 옹호하는 관점에선 “당시 상황에 따라 현실 순응이라는 사세 판단을 한 것이고, 지금 시점으로 옳고 그름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1927년 59세로 당시로서는 고령이었던 홍범도가 생활 방편을 위해 공산당에 가입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장석흥 국민대 명예교수).1922년 소련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은 뒤로 홍범도는 항일 운동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현실적 이유도 든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쪽에선 “1922년 이후 별세까지 20여 년 동안 홍범도는 더 이상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④말년의 홍범도: 계급 해방 꿈꾼 공산당원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을 때 홍범도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가 소련 당국에 의해 숙청됐다. 김단야는 총살당했고, 김경천은 여러 차례 투옥됐다가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전혀 그런 일이 없이 소련 정부에 순응했다. 홍범도는 동포의 배려로 고려극장 수위를 맡아 임금과 연금을 받으며 만년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다. 결국 독립운동에서 ‘은퇴’한 뒤 러시아 공산당원으로서 여생을 마쳤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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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홍범도는 레닌이 하사한 권총을 줄곧 지니고 다녔으며, 러시아 공산당원으로서 민족 독립운동이 아니라 계급 해방운동을 꿈꿨다”(허동현 교수)는 비판이 있다.

⑤종합적 평가: 독립 영웅은 맞는다, 그러나 육사 생도의 본보기일까?

1920년까지 수행한 대일 무장 투쟁의 업적으로 홍범도를 기려야 한다는 데는 많은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이 있다는 것은 ‘장차 이 사람처럼 되라’는 의미다. 그것을 보는 육사 생도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산주의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주적(主敵)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고는 해도, 만년에 친소(親蘇) 공산주의자가 된 홍범도를 이들이 과연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여러 사람이 비판적 의견을 밝히고 있다.

홍범도 흉상이 육사에 있는 것이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홍범도는 광복군과 관계없는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광복군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 주도로 조직된 군대인데, 당시 홍범도는 이미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고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