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가 지은 한시집이 발굴됐다. 조선 정조 때 활약했던 노비 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정씨 나무꾼’이라는 뜻)의 한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로 약 90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27일 그동안 다른 문헌을 통해 그 존재만 알려졌던 ‘초부유고’를 고려대 도서관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초부유고는 18세기 일급 문인으로 분류되는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4명의 시만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에서 발견돼 정초부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는 정초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안 교수가 이번에 여춘영(呂春永·1734∼1812)의 문집 ‘헌적집(軒適集)’도 함께 찾아냄에 따라 그의 생몰연도, 정초부와 주인의 관계 등이 명확해졌다.
정초부의 주인이었던 여춘영은 조선 후기 문벌가문의 일원으로서 자기보다 스무 살 많았던 노비 정초부를 인간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대했다. 여춘영은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만시(輓詩) 12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는 구절이 나와 두 사람의 돈독했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정초부의 재능을 한양의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뜨릴 정도로 그의 재주를 아꼈던 여춘영은 정초부가 죽자 자신의 아들 둘을 데리고 정초부의 무덤을 찾아가 그를 기리는 제문을 짓기도 했다.
정초부는 나무를 하는 노비였다. 어린 시절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집 자제들이 배우는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정초부가 어린 시절 읊는 한시를 외우는 것을 본 주인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한자를 가르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시는 서정성이 풍부하고 회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한강 동호대교 부근의 풍경을 읊은 시는 당대에 특히 유명해 단원 김홍도가 ‘도강도(혹은 도선도)’를 그릴 때 그림의 시구(화제·畵題)로 사용했다.
안 교수는 “정초부는 천부적 재능이 있어 한시를 지었지만 학문이 깊지는 않아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글자로 시를 지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이 더 친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그가 남긴 약 90수의 시는 서정적이고 조금은 우수에 찬 느낌”이라며 “노비가 한시작가로 두각을 나타낸 현상은 18세기 조선 문화계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1. 허진석, "18세기 ‘노비詩人 정초부’ 한시집 찾았다", 동아일보, 2011.2.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