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통틀어 20세기 최고 언어학자' 조명한 신간 '북으로 간…'

                   이산가족 등 한반도사 압축적으로 담겨…일본인 학자의 연구 결실

                                        1942년경 도쿄제대 대학원 시절의 김수경 © 제공: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일한다는 뜻을 가진 한자 '勞'는 단어의 가운데에서는 '로'로 표기하지만, 맨 앞에 올 때는 '노'로 읽는다.

   단어의 첫머리에 'ㄴ'이나 'ㄹ'이 올 때 발음과 표기가 변하는 두음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노동'은 '로동'으로, '이론'은 '리론'으로, '역사'는 '력사'로 읽는다. 사람의 성을 표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의 언어를 논할 때 가장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 이 부분은 '로동신문'에 발표한 어느 논문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언어학자 김수경(1918∼2000)의 연구 성과다.

                                         1942년경 도쿄제대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 제공: 연합뉴스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푸른역사)은 20세기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언어학자로 손꼽힌 '천재' 김수경의 생애를 좇은 책이다.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일본 도시샤대학 교수가 2021년 일본에서 출간한 이 책은 약 3년 만에 한국어로 나왔다.

   김수경은 우리 학계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학자 중 한 명이다.

   1918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경성제대 조선어학 연구실의 촉탁으로 일했다.

   김수경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최소 10개 이상의 언어를 습득해 '언어 천재'로도 불렸다. 그에게 언어학을 가르쳤던 스승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가 놀랄 정도였다.

   "그의 독일어 이해력은 상당했다. 재능이기도 하겠지만, 철학과 수업에서 늘 어려운 것을 읽다 보니 내용 파악력이 꽤 날카로웠다. 제자에게 배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스탈린 논문 2주년에 나온 책자 © 제공: 연합뉴스
그러나 김수경의 삶은 1946년 8월 북으로 넘어가면서 여러 변화를 겪는다.김일성종합대학의 창립 멤버가 된 그는 소련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북한 건국 초기의 언어학과 언어 정책을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두음법칙을 폐지하는 게 언어생활에 더 유익하다는 점을 형태주의 이론으로 밝혔고 '조선어 신철자법'(1948), '조선어 철자법'(1954). '조선어 문법'(1949) 등을 집필했다.

    북한에서 언어와 관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셈이다.

                                    1986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사진 © 제공: 연합뉴스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냉엄한 현실과 남북 분단 상황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전쟁의 포화 속에 엇갈려 남과 북,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1988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딸 혜영 씨와 상봉하기까지 가족은 40년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책은 김수경의 삶과 학문 세계를 교차해 서술하며 식민시기, 해방 전후, 한국전쟁기, 분단 이후를 살아간 한 지식인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다.

    평전 형태에 가깝지만, 이타가키 교수는 이 책을 '일종의 학문사'라고 규정한다.

    전문 영역의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선행 연구를 정리하는 학설사와 달리, 학문 그 자체를 역사의 부분으로 여기고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다.

                                                48년 만에 재회한 김수경과 이남재 © 제공: 연합뉴스
 실제로 한국전쟁에 종군한 김수경과 그를 찾아 월남한 가족의 엇갈림, 캐나다로 이민 간 딸과의 해후, 편지 왕래 끝에 겨우 만난 아내와의 이야기 등은 한반도 역사를 압축적으로, 또 여실히 보여준다.


   "그가 걸은 길은 상아탑에서 이루어진 학문 '내부'의 이야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 김수경의 발자취는 그러한 북한의 정치·문화사의 핵심 문제에도 근접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는 2010년 캐나다에서 우연히 만난 김수경의 딸로부터 '아버지가 북한에서 언어학자였다'는 말을 들은 뒤 김수경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국제 심포지엄을 준비하며 이어진 연구는 김수경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고, 2021년 책으로 결실을 봤다.

   한반도와 한일관계 전문가로 잘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쓰인 적 없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작품"이라고 평을 남겼다.

                                                  고영진·임경화 옮김. 552쪽.

책 표지 이미지© 제공: 연합뉴스

                                                                       <참고문헌>

  1. 김예나, 北 언어학 설계한 '천재'…분단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 김수경", 연합뉴스, 2024.2.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