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울과 평양이 함께 추모하는 유일한 항일독립투사 양세봉 장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19.06.27 10:54

                                                           서울과 평양이 함께 추모하는 유일한 항일독립투사 양세봉 장군

   1934년 9월 20일 평안북도 철산 사람 양세봉(梁世奉)이 죽었다. 전날 중국 요령성 환인현 소황자촌 옥수수밭에서 총을 맞았고, 이튿날 죽었다. 일주일 뒤 누군가가 그 무덤을 파헤쳐 작두로 목을 잘라 갔다. 서른여덟 살이었다. 양세봉은 만주 항일무장투쟁조직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었고 그를 죽이고 시신을 잘라간 자는 일본군 밀정이었다. 목 없는 독립군 영혼은 지금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49번 허묘(虛墓)에도 이 젊은 독립군이 잠들어 있다. 사상 또는 이념 또는 권력투쟁에 관해 아는 바 전혀 없이 항일투쟁을 지휘했던 사내였다. 남과 북 현충시설에 동시에 묘로 안장된 유일한 투사, 양세봉의 일생 이야기다.
                                                                          1. 양세봉의 성장과 무장 세력의 통합  
   1896년 7월 1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태어난 양세봉은 집안이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 열여덟에 남의 땅 소작 치고 살던 아버지가 죽었다. 집에는 큰형 바라보는 남동생 셋, 여동생 하나와 엄마가 있었다. 1918년 식구들 이끌고 압록강 넘어 정착한 신빈현 만주 땅에서도 만주족 지주 소작을 치며 살았다. 이듬해 본국 조선에서 만세운동이 터졌다. 그해 5월 양세봉은 흥경현 홍묘자 한인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이듬해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신빈현 조직을 맡았다. 소작 농부 양세봉은 조금씩 독립운동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무렵 평안도에서 활동하던 무력 투쟁 조직 천마산대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중국 요령성 신빈 만족자치현 왕청문진 강남촌 대협피골 골짜기에 서른여덟 살에 죽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석상이 서 있다.
   민족주의자 양세봉은 일본 밀정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양세봉의 묘는 대한민국 국립현충원과 북한 애국열사릉 두 곳에 다 있다. 권력이나 사상 투쟁과 무관하게 민족을 위해 산 장엄한 인물은 그렇게 논란 없는 존경을 받는다.
   만주 무장 조직 사이에 대한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세력(복벽파)과 공화주의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이어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대표되는 무장 조직이 서로 주도권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 복잡하고 지루하고 적전 분열적인 논쟁 끝에 1928년 정의, 신민, 참의 세 부가 해체되고 국민부로 통합됐다. 1929년 국민부는 산하 무장 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양세봉은 혁명군 부사령관에 임명됐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2. 군신(軍神) 양세봉과 조선혁명군  
   조선혁명군이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친일 세력 척결이었다. 타깃은 일본이 만든 꼭두각시 단체 '선민부'였다. 양세봉은 '선민부토벌지휘부' 부사령관도 함께 맡았다. 1929년 9월 3일 자 '중외일보'는 '국민부 소속 조선 ○○군과 무장경비대 충돌 접전'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수개월 전 통합된 국민부 소속 '조선혁명군'이 친일 단체 박멸 작전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20일 뒤 '중외일보'는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반동 한인교포 동향회, 전 간부 총살 결의'. 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향회 간부 전원 총살을 결의한 후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 하며 총지휘자는 조선○○군대 오대장 량서봉(梁瑞鳳)이라더라.' '량서봉'은 양세봉의 본명이다.   양세봉은 만주는 물론 조선 본국 국내 침투작전도 수시로 벌였다. 1932년 한 해에만 16차례에 걸쳐 부대원 101명이 압록강을 건너 군자금 모집과 기관 습격, 친일파 처벌을 주도했다.(장세윤,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연구') 조선혁명군은 1938년 내부 갈등으로 해산될 때까지 일본에 대한 만주 지역 무력 투쟁을 주도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신빈현에서는 그를 군신(軍神)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김좌진과 홍범도 같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쟁쟁한 독립군 장군은 어디로 가고 양세봉이라니. 이유가 있다.                              
                                                                         3. 자유시 참변과 텅 빈 만주
   항일 명장 양서봉(抗日 名將 梁瑞鳳). 양서봉은 양세봉의 본명이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5만 병력을 동원해 만주에 있는 한인 무장 조직은 물론 한인 공동체까지 뿌리뽑는 간도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3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고, 그때 완성돼 있던 독립군 세력은 와해되거나 연해주로 넘어갔다. 연해주로 넘어간 독립군 세력은 알렉세예브스크, 일명 자유시에 집결했다. 볼셰비키가 장악한 러시아 적군은 연해주를 점령한 일본군에 철수를 요구했고, 일본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공산주의 계열 조직인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가 독립군 통수권을 두고 맞붙었다. 볼셰비키는 이르쿠츠크파를 앞세워 독립군 무장해제를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결과는 전사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유시사변')   만주 무장 투쟁은 와해됐다. 많은 민족주의 계열 무장 조직이 공산주의 계열에 등을 돌렸다. 그 공백을 메운 조직이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었다.
                                                                                 4. 민족주의자 양세봉
   1930년 조선혁명군 소속 기관인 국민부에서도 노선 갈등이 터졌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민부가 민중을 떠난 반동 기관으로 변했으니 해체해야 한다고 했다. 민족주의 계열은 반대했다. 민족주의 운동가 양세봉은 좌익 계열 인물들을 전원 축출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후 1934년 중반까지 조선혁명군은 원래대로 민족주의적, 반공적 성향을 유지했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49번 묘. ‘순국열사 양세봉의 묘’라 새겨져 있다. 후손이 없는 애국지사는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모시는데, 양세봉만은 1974년 가묘를 만들어 묘역에 안장됐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듬해 3월 1일 관동군은 만주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자연스럽게 조선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대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연합군 병력은 2000명 정도였다. 중국군과 맺은 협상 조건에는 '양국의 군민은 일치항전하고,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나누어 맡는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국사편찬위,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조선혁명군의 편성') 신빈현을 주무대로 벌인 연합작전은 관동군 사살 및 부상 1000명이라는 대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국민부 갈등을 봉합하고 연합작전을 펼치기 전 양세봉이 이렇게 말했다.   "한때 나에 대하여 (공산주의로) 귀순할 것을 종용하는 자가 있었지만 나는 과거에도 민족주의가 확고하고 기타 동포의 피를 착취한 사실이 없었다. 부하 군인으로서 (민족주의에) 귀순할 뜻을 가진 자가 있다면 독립전쟁의 초지를 관철하라!"                                
                                                                               5. 양세봉의 끔찍한 죽음
   그런 양세봉이 죽었다. 1934년 9월 관동군 첩보부대와 통화(通化)에 있는 일본 영사관 분관이 보낸 밀정 박창해에 의해 죽었다. 9월 19일 박창해가 매수한 마적 수령 압동양이 혁명군 주둔지인 환인현 북전자툰에 나타났다. 그날 밤 압동양은 "내 부대원 전원이 혁명군에 입대하겠다"며 양세봉을 근교로 유인했다. 압동양은 순식간에 옥수수밭으로 사라졌고, 매복해 있던 일본군이 양세봉을 기습했다. 양세봉은 가슴에 총알을 맞았다. 동료들이 그를 치료했으나 다음 날 죽었다. 양세봉은 7일장을 치른 뒤 고구려산성 아래 묻혔다.
                                                                                         <참고문헌>
   1. 박종인, “서울과 평양이 함께 추모하는 독립군, 양세봉”, 조선일보, 2019.6.26일자.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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