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린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꾼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5.02 20:32

                                          어린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꾼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애와 업적 


    "지난 4월 22일 오후에 방송된 KBS2 '도올학당 수다승철'에서는 '어린이와 청춘'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올은 방정환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방정환은 1923년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훈민정음에 있는 '어리다'의 뜻은 '몽매하다(어리석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는 부정적인 단어였지만, 방정환은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를 말을 부르자고 했다.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세째 딸의 사위로,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꾼 사람이다."


    방정환(煥,1899.11.9-1931.7.23 ) 은 1899년 11월 9일 음력 10월 7일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방경수와 손성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방씨(溫陽方氏), 호는 소파(小波 )이다.

   조부는 야주개 시장거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이다. 방정환이 태어났을 무렵,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던 그의 집안은 야주개에서 나름 큰 상인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병약하여 늘 누워 지내고 있었지만,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은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5세부터 7세까지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의 지도로 천자문을 배웠다. 집에서 한문을 익힌 그였지만, 두 살 위의 삼촌이 교복을 입고 신식소학교에 다니는 것을 늘 부러워했다. 7세 소년 시절 방정환은 삼촌이 다니던 보성소학교에 따라갔다가 우연히 김중환 교장의 눈에 띄어 전교생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당시 신식학교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야 했다. 머리를 깎고 입학하는 것을 조부는 반대했지만, 가족들은 그의 뜻을 따라줬다.

    방정환이 다닌 보성소학교는 한말 친러파의 거두이자 고종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세운 사립학교다. 한미한 출신이었던 이용익은 보부상으로 또 금광꾼으로 변신하며 재력을 쌓았고, 세도가로 출세한 인물이었다. 서당교육이 선호되던 시기에 보성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이 개방적인 상인 집안인데다가 경제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에서 개구쟁이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잠시, 1907년을 기점으로 그의 집안은 갑작스럽게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이후 명성황후의 시해와, 아관파천 등 국내외 정세는 늘 불안정했고, 왕실을 상대로 사업을 했던 그의 집안은 거듭되는 부친의 사업실패와 함께 하루아침에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이후 어린 방정환은 배고픔과 싸우며 견디기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08년 10세가 되던 해 방정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가진 소년으로 성장하게 되는 행운을 만났다. 총명한 그의 재질을 눈여겨보던 어느 미술가가 그에게 환등기 한 대를 선물한 것이다. 그때부터 방정환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환등기를 비춰 보이면서 무성 영화의 변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 환등기는 어린 방정환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환등기를 획득(?)한 방정환은 이 신기하고 재밌는 놀잇거리를 통해 연극과 활동사진 제작에 대한 감을 익혔다. 환등기는 어린 시절에 당했던 불행과 슬픔에서 그를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던 치유제였고, 환등기에서 나오는 빛은 낯설지만 새롭고 신기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는 마술 같은 불빛이었다.

   환등기를 가지고 놀던 10살의 소년 방정환은 대한문 맞은 편에 있던 친구 집에서 어린이 토론 연설 모임인 ‘소년입지회’ 활동을 했다. 소년입지회는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핵심인물이었던 권병덕(, 1867~1944)이 조직한 모임이다. 방정환이 천도교와 연관을 맺게 된 것은 사업 실패를 거듭한 부친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천도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의 영향으로 천도교인이 된 방정환은 소년입지회에서 동화구연과 토론회 등을 하며 정신세계를 가다듬어 나갔다.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에 미동보통학교(집안의 이사로 전학함)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상업 공부를 하여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가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을 따라 선린상고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환등기를 가지고 놀며 열띤 토론을 하던 문학 소년에게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결국, 졸업을 1년 앞두고 조선은행 서기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중퇴하였다.

1915년 17세에 장남으로서 집안 형편에 보탬을 주고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자생() 생활을 하며 독학하였다. 앞날이 안 보이는 하루하루였지만, 꿈을 잃지는 않았다. 훗날 방정환이 재능있는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긴 것도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한이었다.

   방정환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은 1917년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1862~1922)의 딸과 결혼하면서부터이다. 방정환이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병덕에 의해서였다. 소년입지회 활동을 시작으로 어린 방정환을 평소 눈여겨보던 권병덕은 그를 의암 손병희에게 소개했다.

   손병희의 사위가 된 방정환은 토지조사국 사자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가난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방정환의 활동은 마치 적토마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유광렬, 이중각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고, 1919년에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경성청년구락부는 민족운동에 뜻을 둔 18, 19세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비밀클럽이었다. 이후로 방정환은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번역가 생활을 했고 습작을 하며 자신의 재능과 꿈을 키워나갔다.

   1918년 12월 봉래동 소의소학교에서 개최된 ‘경성청년구락부’의 송년회에서 방정환은 첫 자작 각본인 소인극 [동원령]을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어린시절 연극과 영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어린 방정환이 어느덧 성장하여 직접 극본을 쓰고 소인극 활동을 한 것이다. 그는 어린시절 꿈을 한 걸음씩 이뤄 나갔다. 천도교의 정신적·물질적·조직적 뒷받침을 받으면서 청년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수많은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고, 남달리 문예에 관심이 많아 소설과 수필, 시 등을 발표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방정환은 3월 1일 자를 마지막으로 못 나오게 된 <조선독립신문>을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고,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그해 12월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을 발행하였다.

   <신청년>과 <녹성> 발간 경험을 토대로 방정환은 <신여자>의 편집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의 활동은 그가 1920년대에 본격적인 언론·출판인으로서의 활동을 펴나가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20년 당시 방정환은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잡지인 <개벽>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받았고,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창립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도요()대학 철학과에 특별청강생으로 다니며, 철학과 아동문학, 아동심리학과 문화학 등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장으로서 청년을 선동하여 저항운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종로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며칠 만에 풀려나자 다시 일본으로 떠나 세계 명작 10편을 번역하여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방정환, ‘어린이 동무들에게’ 중에서, <어린이> 1924, 12

1923년은 방정환에게 특별한 해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가 본격적인 아동문학과 문화운동을 전면에서 전개했다. 1923년 3월 16일 도쿄 하숙집에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 창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도쿄에서 편집한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개벽사에서 3월 20일 창간하였다. 색동회는 3월 30일 창립되었고,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인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어린이날’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5월 1일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이 선창 되었고,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대식과 함께 어린이날 기념식이 최초로 열렸다. 어린이날은 이후 천도교 중심의 민족주의 소년운동과 오월회 중심의 무산소년운동으로 통합되고 분열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의 날짜가 변경된 것은 1928년이다.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메이데이 날과 공교롭게 겹치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이날 행사가 매년 지속되었지만,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에 금지됨과 동시에 소년단체도 강제 해산을 당했다.

어린이날은 해방 이후 1946년 5월 5일로 공식 제정되면서 부활하였다. 5월 첫 일요일이었던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바뀌게 된 것은 1946년 해의 첫 일요일이 마침 5월 5일이고,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5월 5일로 날짜를 고정시킨 것이다. 해방 이후 첫 어린이날 기념행사는 휘문중학교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될 때까지 방정환이 만든 색동회를 중심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어린이날과 함께 국내 최초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만든 방정환은 언론인이자 출판인, 운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직전까지도 동화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했던 어린이들의 대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이 국민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1960년대 들어와서이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은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방정환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어린이를 위해 한국 최초의 동화집을 펴내고 어린이날을 만들어 준 분으로서 칭송받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불꽃처럼 짧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방정환의 호인 ‘소파()’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아동문학자인 이와야 사자나미()의 호를 본떠서 지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전개한 김기전의 호인 ‘소춘()’과 연관지어 천도교 사상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한 설이다. 어느 날 방정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김기전과 함께 호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김기전은 소춘으로 자신은 작은 물결이라는 뜻인 소파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

   1. 정성희 글/장선환 그림, 인물한국사, 네이버 캐스트, 20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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