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로런스의 근대문명 극복론과 한반도 후천개벽 사상의 만남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7.27 03:42

                                                           로런스의 근대문명 극복론과 한반도 후천개벽 사상의 만남

                        



20세기 영문학의 거인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창비 제공.                    
                   20세기 영문학의 거인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창비 제공.

백낙청(82) 서울대 명예교수의 활동 범위는 문학평론에서 통일운동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지만, 영문학자라는 정체성이야말로 백낙청 학문 인생의 중심을 이룬다. 영문학자로서 그의 이력의 근간이 되는 것을 꼽으라면 영국 작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1885~1930)를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 나온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는 50년에 이르는 백낙청의 로런스 연구를 총결산하는 저작이다. 이 책과 함께 백낙청의 1972년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 번역본 도 나왔다. 백낙청 사유 여정의 출발지를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를 관통하는 지은이의 관점은 책 제목에 들어 있는 ‘개벽사상’에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서양의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려 한 로런스의 분투를 ‘서양식 개벽사상’으로 이해하고 이 사상을 19세기 동학에서 시작해 20세기 원불교에서 만발한 한반도 후천개벽 사상과 회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야심 찬 저작이다. 지은이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루카치, 하이데거, 데리다, 랑시에르, 바디우와 같은 서양의 주요 사상가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사유를 로런스의 사유와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이 책은 로런스를 위대한 작가로서 주목하는 것을 넘어 서양의 근대성 자체를 극복하려 한 개벽사상가로서 로런스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로런스 사유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로런스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형성된 백낙청 사유의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로런스는 45년의 짧은 생애 동안 시, 소설, 평론, 에세이를 포함해 전집 4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긴 영문학의 거인이자, 주요 작품에서 범속한 작가들이 따라오기 어려운 독특한 사상을 펼친 천재형 작가다. 그러나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동료 작가들은 로런스를 ‘생각 없는 사람’이라고 낮춰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동시대 영국 시인 엘리엇이 로런스를 두고 “우리가 보통 ‘생각’이라고 부르는 능력의 부재”를 거론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도 그럴 것이 로런스는 당대 문인들과 달리 탄광촌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학업을 마친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엘리엇의 비아냥과 달리, 진실은 로런스가 과감하고도 장대한 ‘사유의 모험’을 감행한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로런스는 여러 산문에서 “인간은 사유의 모험가다”라고 언명했고, 소설 <캥거루>에서는 ‘소설이란 감정의 모험의 기록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사유의 모험이기도 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렇게 ‘사유의 모험’을 강조한 사람이라면 소설을 쓰기보다는 철학이나 사상을 직접 연구했을 법한데, 로런스는 끝까지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만큼 소설이라는 것이 중요했다는 뜻인데, 로런스는 <장편소설>이라는 산문에서 “장편소설이야말로 이제까지 성취된 인간의 표현형식 중 최상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자신의 소설관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며 (…) 이런 이유로 나는 소설가다. 그리고 소설가인 까닭에 나는 내가 성자, 과학자, 철학자, 시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는 살아 있는 인간의 각기 다른 부분의 대가들이지만, 그 전체를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로런스가 상찬한 장편소설에 기독교 성서나 호메로스의 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들어 있었고, 때로는 플라톤의 대화편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당대의 장편소설들을 ‘죽어 가는 사람의 가래 끓는 소리’로 치부했다. 작가로서 오연한 자신감이 밴 발언이자, 로런스가 살아 있는 인간을 전체로서 그려낸 것만이 장편소설에 값한다고 믿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결국 ‘총체성’이 작품 성패의 관건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점에서 로런스의 소설론은 총체성에 주목한 루카치의 소설론과 비교할 만하다. 그러나 지은이는 루카치의 소설론이 당대 세계모순의 핍진한 재현을 강조했다고 해도, 로런스의 소설론이 보여준 심원한 깊이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제1부에서 <무지개>와 <연애하는 여인들>을 비롯한 로런스의 대표작들을 경유하면서 로런스가 추구한 사상을 탐사한다. 이어 제2부에서 로런스의 사유가 육성으로 표출된 산문들을 검토해가며 로런스 사상을 부연하고 확장한다. 로런스 사상의 핵심은 그가 1차 세계대전 중에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제 실현될 것을 압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찾는 로런스 사유의 지도를 그려나갈 때 지은이가 즐겨 쓰는 방법이 비교와 대조다. 여러 사상가들을 로런스의 상대자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가운데 로런스의 시대 비판과 문명 비전에 육박하는 사상가로 거론되는 사람이 마르크스와 니체다. 니체는 초인을 앞세워 모든 가치의 대전환을 역설했고,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가 되는’ 자유의 왕국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유도 로런스의 눈이 투시한 인간과 우주의 깊은 곳까지는 미처 들어가지 못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지은이가 이렇게까지 보는 것은 로런스의 존재론과 진리관이 특출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로런스는 소설과 산문에서 자주 ‘being’이라는 낱말을 사용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이 낱말은 우리말로 흔히 ‘존재’로 번역되는데, ‘우리의 역사적 실존을 통해 드러나고 성취되는 삶다운 삶’이자 ‘자기다움의 완전한 실현’을 가리킨다. 이런 존재의 실현은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에도 부여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로런스는 들판의 민들레꽃을 예로 들어 말한다. “푸른 대지 위에서 햇빛을 번뜩이는 작은 태양인 민들레는 유일무이한 천하일품이다. 그것을 지상의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 자체로 비교가 불가능하며 고유한 존재다.”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참모습을 활짝 꽃피운 상태가 로런스가 말하는 존재(being)다. 그런 의미의 존재(being)를 실현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에서 출발하여 정의할 수 없는 현존을 이루는 데 달렸다.” 로런스는 우리 인간 각자가 이렇게 ‘헤아릴 길 없는 신비’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사회생활의 모든 거대기획이 토대로 삼아야 할 사실”이라고 말한다. 로런스가 말한 ‘존재’(being)는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Sein)와 통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존재’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이 완성되는 삶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로런스는 ‘진리’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음양의 조화와 합일에서 진리가 발생한다는 로런스의 진리관은 니체나 마르크스에게서 볼 수 없는, 서양 사유의 한계를 돌파하는 지점이며, 바로 이 지점이 로런스의 사유가 불교, 노장사상, 후천개벽 사상 같은 동아시아 사유와 만나는 접점이 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나아가 로런스는 바로 이 존재론과 진리관에 입각해 자신의 고유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하는데, 그 민주주의는 단순한 평등이나 자유를 넘어 “열린 길을 가고 있는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민주주의”이다. 이 만남은 “영혼들 간의 기쁜 알아봄이요 위대한 영혼과 한층 더 위대한 영혼들에 대한 더욱 기꺼운 숭배다.” 지은이는 이런 영혼들이 “말하자면 불보살들이며 ‘길이 열리는 대로 열린 길을 걸어 미지의 세계로’ 가는 ‘도인’(道人)들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도인들의 민주주의가 바로 문명의 대전환을 통해 열리는 후천개벽 세상의 새로운 인간질서가 될 것이라고 지은이는 전망한다.
                                                                                       <참고문헌>

    1. 고명섭, "로런스의 근대문명 극복론과 한반도 후천개벽 사상의 만남", 한겨레신문, 2020.7.17일자.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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