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구려·발해사 연구 여전히 혼돈, 남북 학술교류 필요하다.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8.05 18:25

                                                           고구려·발해사 연구 여전히 혼돈,  남북 학술교류 필요하다.

    노태돈(71)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사학계의 대표적인 고대사 연구자다. 그가 1975년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논문에서 제시한 ‘고대국가 부체제론’은 현재 학계의 통설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 시대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이 아니라 부의 연합체가 국가를 운영했다는 게 ‘부체제론’의 뼈대다. 그가 80년대 후반에 내놓은 ‘요동에서 평양으로의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도 학계 통설이다.

   그의 대표작 <구려사 연구>(1999) <삼국통일전쟁사>(2009)는 고구려 국가의 형성과 전개, 삼국통일전쟁의 전개와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저로 평가받는다. 그가 서울대와 계명대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며 키운 제자 중 20여명이 현재 한국 고대사 분야 교수다.

   1980년부터 2012년까지 고구려와 발해사를 주제로 발표한 논문 8편을 모아 최근 <고구려 발해사 연구>(지식산업사)를 펴낸 노 교수를 지난 28일 서울 강동구 명일동 자택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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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발해사 연구> 표지


     이번 책은 그가 2014년 퇴임 뒤 낸 첫 저술이다. “제가 고구려사로 시작해 고조선사나 부여사, 발해사와 같이 한국 고대사의 북방 쪽 나라들의 역사를 연구했어요. 이 책에는 <고구려사 연구>가 나온 뒤에 쓴 고구려 주제 논문과 틈틈이 쓴 발해 논문을 모았어요. 발해사는 자료가 워낙 적어 지속해서 쓰기 힘들었죠.” 1부 고구려 편에서는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집안)으로 천도한 시기를 두고 학계 통설인 유리왕 22년(서기 3년)을 따르지 않고 산상왕 13년(209년)으로 제시한 논문과 광개토대왕릉비에 요동지역 병합 사실이 빠진 배경을 살핀 논문 등이 실렸다. 2부 발해 편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의 성격을 뚜렷이 지녔음을 발해인 족원 연구를 통해 실증하는 논문과 ‘발해 박씨’ 연구로 신라와 발해의 교류 양상을 살피는 논문 등이 담겼다.

    그는 이 논문 주제들이 여전히 학계의 관심 대상이라고 책 서문에 썼다. 논문이 나온 뒤 후속 논의가 어떻게 진전됐는지 궁금해하자 노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고구려 수도의 위치는 객관적 사실 확인의 문제이지만 조금만 들어가면 논의가 진전되지 않아요. 문헌이 적고 불분명해서죠.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성 위치를 두고도 50년 이상 논쟁이 계속되고 있어요.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죠. 중국이나 북한 학계도 마찬가지로 혼돈을 겪고 있어요.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는 고구려 유적에 대한 중국 쪽의 폐쇄적 태도도 어려움을 키운다고 했다. “중국이 발해왕비릉을 발굴하고 그 묘지를 2천년대 초에 공개했지만 아직껏 발굴보고서를 내놓지 않고 있어요. 중국은 고고학 발굴에 외국 학자들을 참관조차 시키지 않아요.” 고구려 유적이 많은 북한과의 학술 교류가 막힌 것을 두고도 아쉬워했다. “함흥 근처 신포에서 80년대에 발굴된 고구려탑지 실물을 확인하고 싶은데 갈 기회가 없어요. 함흥박물관에 있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죠. 함흥박물관에는 진흥왕 황초령비도 있어요. 북한 학자들도 경주나 부여에서 신라나 백제 유적을 답사하고 싶은 마음이 클 겁니다. 이들 유적은 남북한 학자들이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죠.”

책에는 고구려를 중국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성격의 논문도 포함됐다. 고구려가 5~6세기에 중국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것은 교섭 의례에서 상하 형식을 의미할 뿐 고구려는 실제 내정과 외교에서 자치·자주하는 독립국이었음을 강조하는 글이다. “중국 정부는 자기들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이런 자국 정부의 대국주의적 지향을 중국 학자들이 충실히 따르고 있죠.”

    사학자에게 학술과 정치의 관계는 늘 민감한 주제다. 고대의 경우 특히 그렇다. “학술과 정치는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어요.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연계해 움직이는 것은 곤란해요. 학문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아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학술은 정치와 직접 연관되어 있죠. 북한도 학문이 정치로부터 직접 압박을 받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들과 차이가 있죠.” 그는 “정치가 학술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촉진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앞서면 학문에 편향이 생긴다”며 “비판적 발언과 시야가 봉쇄된 시기였던” 박정희 정권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정희 정권 때 새로 유적지를 복원하면 거기에 노란 베이지색을 칠했어요. 강릉 신사임당 유적지가 그랬죠. 최고지도자의 취향이 반영됐죠.”

    그는 퇴임 뒤 계속해오던 대학원 강의를 지난해 7월로 마감하고 지금은 그간 생각해온 몇 개의 저술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고구려사 개설서를 쓰려고 해요. 고구려사를 통사적으로 망라해 전체를 보고 싶어요. 내 연구를 나름대로 마무리하는 작업이 될 겁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해 고구려 금석문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서도 생각하고 있어요. 전체가 어렵다면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서라도 내려고 합니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그는 대구 경북고를 나와 67년에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삼국지> 같은 역사소설을 보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가 고대사를 전공하게 된 데는 1960년 4·19 이후 한국사회에 세를 떨쳤던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영향을 미쳤다. 민족은 지금도 그의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이지만 민족에 대한 이해는 그 시절과 다르단다. “60년대만 해도 민족이 이른 상고 시기에 생겨 운명공동체로 이어졌다고 봤죠. 하지만 이는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여러 집단이 융합해 큰 집단을 이루면서 민족의식이 형성됐다고 봐야죠. ‘한 핏줄 한겨레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도 불과 20세기 초에 나왔어요. 1906~7년 의병전쟁 때 ‘4천년 역사, 3천리 강토, 2천만 동포’란 말을 처음 썼어요. 일종의 선동 구호였죠. 저는 법 앞에 민족구성원의 평등을 기본 전제로 하는 ‘민족 근대 형성론’도 중시합니다. 조선 시대에 양반과 평민, 노예가 서로 같은 민족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허구에 가깝죠.” 그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신라와 같은 시기에 발해가 있었다는 이유로 고려를 첫 통일왕조로 보고 고려 초에야 한국민족이 형성되었다고 기술했다. 아울러 640년에서 700년에 이르는 삼국통일전쟁으로 한민족의 기본 틀이 형성됐다고도 했다.

노태돈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노태돈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그가 고대사를 연구한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 고대사학계의 연구 역량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바람직하다고 할 정도로 커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죠. 2천년대 들어선 남한이 연구를 주도하고 있어요. 요즘은 대학원생들이 북한 논문을 잘 보지 않아요. 80년대 들어 남한이 북한 연구 수준을 뛰어넘었어요. 중국학계는 90년대 이후로 양적, 질적으로 많이 발전했어요. 연구자들도 많고 대학의 한국사 강좌도 많이 늘었어요. 러시아학계는 수준이 그런대로 괜찮아요. 하지만 연구인력 자체가 많지 않아요. 일본도 조선사 전공자는 취직이 되지 않아 후속세대 배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지난 10년을 보더라도 뛰어난 연구자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주변에 숱한 국가가 있었지만 살아남은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한국이다.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중국과 언어가 달라요. 어순이 다르죠. 우리 청동기 문화도 북중국 청동기 문화와는 계통이 달라요. 이렇게 다른 문화적 특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농업국가라는 점도 중요하죠. 중국 주변에서 살아남은 한국과 베트남, 일본이 다 농업국입니다. 목축이나 수렵, 유목 종족은 과거에 형성된 문화를 지속해서 이어가기가 어려워요. 농업국가는 형성된 문화를 이어갈 역량이 있죠. 우리말 단어의 70%가 한자어이지만 우리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했어요. 그 때문에 우리 문화의 독자성 유지가 가능했죠.”
                                                                                        <참고문헌>

   1. 강성만, "고구려·발해사 연구 여전히 혼돈…남북 학술교류 아쉽네요”, 한겨레, 2020.7.30일자.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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