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등 다양한 수식어가 방증하듯 현대경제사와 궤를 같이한 한국의 대표 기업가다. 아산이 일군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조선, 건설, 유통, 자재, 금융 등 주요 산업을 아우르는 글로벌 기업들로 성장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90년대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대표이사가 직접 스카우트해 현대전자에도 몸 담았던 박광수 칼럼니스트가 올해 75주년을 맞은 현대그룹을 파헤쳐본다.

<49> 아산 정주영 회장의 대북정책①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 시행

아산의 ‘평생소원’ 대북사업 시작

 

‘남북교류의 상징’ 된 금강산관광

2008년 ‘관광객 피격’으로 중단돼

 

“고인 된 친구 못 봐서 안타까워”

고향서 인간의 순수함 보인 아산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오른쪽)이 1998년 10월 30일 밤 평양시내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공: 현대그룹)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오른쪽)이 1998년 10월 30일 밤 평양시내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공: 현대그룹)

  대한민국은 현시점에서 볼 때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북한은 공산정권인 3대 세습의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보유하고 여전히 미국을 비롯해 한국 정부를 간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간직한 한국은 중국, 러시아, 일본의 3강 국가에 둘러싸여 있어서 자주 무력 충돌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으나, 우방국 미군의 주둔으로 그나마 북한의 여러 차례 돌발적인 공격에도 굳건하게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한국은 일본의 압박에 의거 국가를 일본과 합방하는 불행한 역사를 겪었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구소련(현 러시아)과 중국의 막강한 군사 지원을 받은 북한의 6.25전쟁으로 수백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국토는 황폐했다.

  당시 대구와 부산 일부를 남긴 상태로 공산화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의 지도자 맥아더 장군의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면서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의 눈물겨운 지원요청을 받은 중국군 수백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맥아더 장군은 일본이 항복한 것처럼 중국 요지에 핵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종식하자고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확전을 반대한 트루먼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파직시켰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군복을 강제로 벗으면서 “노병은 절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위대한 은인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그가 지휘한 인천 앞바다를 정면으로 바로 보는 동상을 인천 자유공원에 세우고 추모하고 있다.

판문점을 통해 넘어가는 통일소 1001마리.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판문점을 통해 넘어가는 통일소 1001마리.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문선명·김일성 만남, 경색된 남북관계 물꼬 터

  이후 박정희 정권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1972년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서 역사적인 남북한의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1991년 12월 6일 고인이 된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가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김일성과 3시간의 역사적 특별회담을 하면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열었다. 또 한반도전쟁 재발 방지, 조국 통일의 해법 모색, 한반도 중심의 평화 메시지 전파, 남북한의 연결고리 역할, 이산가족 상봉 문제, 남북한 경제협력과 핵 문제 해결 방안에 합의했다. 

  이는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민간인 신분으로 협상하면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 관계를 풀어 보자는 동기를 만들어 낸다. 

                                        ◆금강산관광, 1998년 北과 의정서 체결로 시작

  실질적인 대북정책의 시동은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을 시행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평생소원이던 대북사업이 시작됐고, 현대그룹의 제안으로 착수된 개성공단이 최초의 경제사업이다.

  금강산관광의 시작은 1998년 1월 정주영 회장이 남북경협을 위해 방북해 북한 당국과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에 관한 금강산 관광개발 및 시베리아 공동진출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시행됐다. 

  그리고 1998년 4월 30일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가 정식으로 발표되면서 남북한 상호 간의 문화, 체육 분야의 교류를 통해 북한을 방문하는 문화 인사들이 늘어났다. 1998년 11월 18일부터 2008년 7월 11일까지 시행된 금강산관광은 북한 육군 초병의 총격으로 일반인 관광객이 사망하자 중단됐다. 

  그 당시까지 10년간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금강산관광을 위해 대형여객선(금강호, 풍악호, 봉래호, 설봉호)이 남북한을 왕복했으며, 배로 이동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현대그룹의 제안(2003년 9월 버스와 2008년 자가용 이용 가능)으로 육로를 통한 금강산관광이 가능해졌다. 12시간 걸리는 통관절차의 불편함은 관광객들이 감수해야 가능한 관광이었고, 현대그룹은 관광객들이 편하게 숙박할 수 있는 해금강호텔을 신축했다. 

1989년 1월 북한의 조부묘소 앞에서의 정주영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1989년 1월 북한의 조부묘소 앞에서의 정주영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주요 관광지는 금강산 유명폭포인 구룡폭포, 만물상, 삼일포 등에서 해금강과 동석봉, 세존봉으로 확대됐으며, 야영장과 해수욕장 등도 개방했다. 특히 구룡폭포는 금강산관광의 구룡연 코스로서, 북한 식당인 목련관에서 출발했고, 절경으로 널리 알려진 구룡폭포(높이 74m, 너비 4m)와 구룡연, 상팔담, 비봉폭포를 비롯해 연주담, 옥류담 등 천하제일 폭포와 연못들이 집중된 곳이었다.

  주요 경로지는 목란관-수림대-양지대-삼록수-금강문-연주담-구룡폭포-상팔담 코스이고, 소요 시간은 왕복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구룡폭포 앞 넓은 바위에는 신라시대 달필로 알려진 최치원이 시를 새겨놓은 곳이 있고, 폭포 우측 바위벽에 ‘미륵불’이라는 거대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체는 해강 김규진의 서체로, 세 글자의 글자 길이는 80척, 너비 2척, 깊이 7촌의 명체로 알려졌다.

  금강산관광의 성과를 이룬 현대그룹은 지금의 시점에서 판단해 보면 거금이라고 판단되지만 금강산개발 사업권과 개발시설의 장기 이용 대가를 매달 북한에 지불했고, 6년간의 지급 총액이 9억 4200만 달러에 이른다. 또한 한국관광공사도 금강산관광 활성화에 기여해 2001년 6월에는 현대그룹과 공동사업자로 금강산 관광사업자로 참여했으며 금강산 온천장, 문화회관, 온정각 등의 설치와 면세점사업으로 수익을 봤다.

  그렇지만 관광 비용은 해외 관광비 인상으로 고가로 책정돼서 대한민국 국민은 금강산관광을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후 대한민국 최초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이런 성과로 김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고향 통천면에 가 생존한 친지 만나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아산 정주영 회장의 대북정책 추진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국민이 이미 알다시피 아산은 고향이 이북인 강원도 통천면 출신으로 소를 판 돈만 가지고 홀로 가출해 20세기 한국경제 부동의 1위 기업(한때 세계 9위도 기록) 현대그룹을 만든 가장 국민이 존경하는, 100년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제인 사업가다.

  아산은 대권 도전 실패 후 조용하게 본인이 만든 기적의 땅 서산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이제는 본인의 꿈인 고향으로 돌아가 생존해 계신 친지를 뵙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첫사랑 통천면장의 딸도 보고 싶어 했다.

1989년 1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생가에서 숙모, 조카와 함께 한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1989년 1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생가에서 숙모, 조카와 함께 한 정주영 회장. (출처: 아산정주영닷컴)

  후에 알려진 설에 의하면 통천면 도착 후 제일 먼저 찾은 게 첫사랑 여성이었다는 순애보가 전해졌으나, 그 여성분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으로 통곡했다. 아산은 당시 내가 2년만 일찍이 고향에 와서, 그녀를 서울 아산병원으로 이송해 입원시키고 치료했다면 살릴 수 있었다고 동행인들에게 말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첫사랑 여인(통천면장의 딸로서 신문을 보던 신여성으로 알려졌으며, 정주영 회장은 그 여성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신문을 같이 보면서 친해졌고, 신시대 문화 및 경제에 눈을 뜸)을 보지는 못했지만, 고향에 이미 고인이 된 조부모 묘도 찾아 성묘하고 작은 어머님과 상봉도 했다.

  아산은 반가운 마음에 “참으로 기쁘기 짝이 없다. 고향에 오면 동네에 사는 내 또래 친구들,여러 어르신들 뵙고 인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아산은 “우리 통천면에서 서울 가 성공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말하고 “이미 고인이 된 친구들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는 인간의 순수함을 보여줬다.

  아산 정주영 회장이 남북한 교류를 통해 통일을 염원한 이유 중에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을 정리하면 “우리나라가 비록 뒤떨어진 분야라고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고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은 패배주의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부으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성공할 수 있다” 등이다.

  또한 아산은 “대한민국 국민은 통일로 인해 우리가 힘들어지고 못살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 우리나라 국민이 해왔듯이 앞으로도 통일을 준비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성공적인 통일한반도가 곧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대한민국이 통일된다면 이른 시일 내로 세계 1위의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통일 대한민국을 그리워하던 아산 정주영 회장은 100세까지 살겠다고 지인들에게 호언장담했지만, 노년에 찾아온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2001년 3월 21일 향년 85세로 영면에 들어갔다. 북한에 묻히길 고대한 희망과는 다르게 하남시 검단산 아래 명당자리로 알려진 장소에 영원한 잠자리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맨몸으로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회장을 결코 잊지 못하고 영원히 기억할 것으로 믿는다.

  “대한민국 국민의 경제적 영웅 정주영 이곳에 잠들다.”

                                                                  <참고문헌>

 1. 박광수, " ‘통일한반도’ 꿈꾼 아산… “통일되면 세계 1위 경제 강국 될 것”, 천지일보, 2023.4.14일자. A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