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짧고 불꽃 같은 생을 살았던 조영래 천재 인권변호사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3.03.17 02:14


                        짧고 불꽃 같은 생을 살았던 조영래 천재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고-서울대 법대-사법고시 통과’라는 개발도상국 시대 대한민국에서 권력과 명예가 보장되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도 항상 낮은 곳만을 지향하다가 치열하고 불꽃 같은 생을 살다간, 명실공히 한국 인권 운동사의 거목이었다.


                                                                             

  조영래 변호사가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넘게 시간이 흘렀다. 그를 모르는 세대가 늘어났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조영래의 이름이 희미해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삶과 정신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다음 책들을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 변호사의 글 모음.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엮음(창작과 비평사, 199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 그 인권변론의 발자취(도서출판 까치, 1992)

  <조영래 평전> - 세상을 바꾼 아름다운 열정-안경환 저(강, 2006)

<인권변호사 조영래> - 박상률 저 (사계절, 2001)


  조영래는 아깝게 요절한 천재이다. 고 3때 한일정상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학을 당했는데도 몇 개월 입시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사법시험준비 중인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자 공부하다가 뛰어나와서 학생 장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바로 다음해인 1971년에 합격했을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 거기에 중학교 때부터 불경을 읽던 한문 실력, 사법시험 1차용 영어문제집을 직접 쓸 정도의 탁월한 영어 실력,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글을 썼던 그는 다방면에 능한 천재였다.


                                         흙수저 출신의 반골(反骨) 소년 천재 그리고 전태일

  조영래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대구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소문난 ‘방천가의 빈민가’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거덜 난 후 7남매를 데리고 대책 없이 상경해 서울의 달동네를 떠돌며 지독한 가난에 허덕였다. 방에는 늘 형제들로 빼곡했기에 그는 달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공부해야 했다. 어학에 유달리 뛰어났으며 ‘적벽부’ ‘출사표’ 등 명문에 심취하고 불교 경전을 독학으로 완독했다.

  소년 천재로 불러도 좋을 만큼 명석했던 그는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에 수석입학하며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그가 수석 합격 인터뷰에서 “붙었으면 붙은 거지 수석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냐?”라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유명한 일화다. 조영래 변호사의 인권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변호 사건으로 기억되는 부천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실용적이고 가장 타당한 도덕적 기준 외에 허영심이나 명예욕, 고정관념에서 빚어지는 군더더기들은 단칼에 잘라내는 분”이었다고 그를 추억했다.

  전쟁 후 빈민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소위 ‘개천에서 용난’ 많은 서울대 법대 출신 엘리트들과 그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은 이미 그의 고등학생 시절 반골 정신에서 엿볼 수 있다. 조 변호사는 고학으로 쪼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하여 정학처분을 받았다. 대학 시절 역시 1969년 졸업할때까지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규탄, 6·7부정선거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부정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학생활동을 계속하였고 서울법대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는 것에 일조하였다.

  1970년 ‘노동삼권을 보장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한국 노동 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고, 당시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에게도 평생 남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을 지키는 동안 조영래는 대학가와 종교계, 지식인 사회를 선동하며 누비고 다녔다. 마침내 ‘대학생 친구 한 사람’을 그토록 아쉬워했던 전태일의 장례식은 서울대 법대에서 거행됐다. 80년대를 관통한 노학연대의 맹아가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한편 71년 부정선거를 통해 가까스로 당선된 박정희는 이미 유신을 통한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었다. 전국 대학 서클 해체, 문제 학생 1,800명 연행, 300여 명에 대한 강제 입영 등을 자행했고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있던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18개월간 투옥된다. 그는 출옥 후에도 서슬 퍼런 긴급조치에 민청학련 주모자로 분류되어 도망자의 신분으로 이후 6년을 보낸다. <전태일 평전>은 바로 그 시기에 쓰였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수기에 적힌 대로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 미성년 여성 노동자와 만남과 대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의 도보 귀가 등 소년 및 청년 노동자의 궁핍했던 삶을 그대로 체험하며 책을 썼다.

   그러나 3년 만에 완성된 이 원고는 출판사를 잡지 못한 채 일본을 떠돌다가 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의 작가 미명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당시 변혁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 영혼들의 양심을 뒤흔든 책이었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자신을 혹사했던 인권 변호사의 짧은 삶

  조영래 변호사는 입신양명의 관문인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나서도 고난의 길을 고집했다. 1971년 2월 사법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으나 또 다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운 피신 생활에 들어갔다. 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된 조영래는 수배 생활 내내 그의 곁을 지킨 동지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든다. 그의 붓은 합법적 공간을 만나 신명을 얻었다. 그의 무기 역시 ‘법’이라는 강력한 전문성을 얻었다. 시민 공익법률 사무소에 둥지를 튼 그는 5공의 인권 경시풍조를 향해 국제인권규약을 상기시키고, 학원안정법 입법 기도를 향해 위헌적 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와 서울시를 상대하여 2,000여 가구 수재민의 소송을 맡아 심혈을 기울여 3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 사법 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었다.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으로 인권보고서 집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독재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으로 인권수호를 주장하는 힘 있는 글도 많이 발표하여 글을 잘 쓰는 변호사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설에도 관여하였다.

  그의 이력에서 1986년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전태일 평전과 함께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업적이다. 여대생 권인숙을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찰이 성고문했고 이를 폭로한 권인숙에게 “여성의 성 마저 운동의 도구로 이용한다”며 당시 독재정권과 어용언론들이 매도한 80년대의 대표적 인권 유린 사건이었다. 비록 이 사건은 당시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지만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은 전두환 정권의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이 사건은 87년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88년 4월 성고문 경찰 문귀동은 구속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외에도 1985년부터 각종 노동사건의 변론에 골몰하였고 보도지침사건 변론, 진폐증 보상사건 등 노동, 빈민, 공해, 학생관련 사건 등을 맡아 열성적인 변론을 해 왔다. 그야말로 눈부신 활동이었으나 자신도 말했듯이 심신이 힘들고 본업에 무리가 갈 정도로 수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등 격무의 연속이었다. 학생운동가, 반독재투쟁가, 인권변호사, 문필가였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잠시도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았던 유명한 골초였다. 결국, 그는 1990년 9월 초순 청천벽력같이 폐암 3기의 진단을 받은 뒤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12일 43세로 타계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조영래를 기억하자

  조 변호사와 절친했고 80년대 재야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장기표 씨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바란 높은 꿈과 희망,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을 이루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강인한 의지와 집념이 같았다.”고 그를 평가했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성고문 사건 당시 자신도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조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 오히려 그의 생계가 걱정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1심 변론 요지도 그렇고 고발장과 함께 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글을 거의 조 변호사님이 쓰셨다. 재밌었던 것은 그분의 구두였다. 낡다 못해 일부는 떨어지기까지 한 구두를 보고서 나는 어이없게도 그분의 생계를 걱정했다. 수임료도 안 내는 시국 사범들 변론이나 하시면서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실지 짐작이 안 갔다.” 권 교수가 기억하는 조영래 변호사의 모습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창립을 주도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선수 전 회장은 조 변호사를 “무엇보다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평했었다. 집단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년), 여성차별을 바로잡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1986년),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1987년) 등은 ‘인권감수성’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시도하기 어려운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경향신문 : 2004년 10월. 실록민주화 운동 (71) 인권변호사 조영래

   2. 대한변협신문 : 2009년. 김이조 변호사

   3. 연합뉴스 : 2010년 12월 10일. ‘서울YWCA연합회관’ 강당에서 ‘조영래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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