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
1948년 반민특위 출범 후
단죄하나 했지만 처벌 ‘0’
업보 오늘날까지 이어져

   과거의 역사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일수록 현 세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청산하는 자세를 보여야만 한다. 광복의 환희는 곧 망국의 부끄러움이 있었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돌이켜보라. 청산되지 못한 과거 친일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친일의 역사로 기록되는 처지다. 하나의 거짓이 또 다른 거짓을 낳고 왜곡으로 덧칠된 역사가 대를 이어 이어지고 있는 쓰린 현실의 단면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기도록 친일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우리는 또다시 삼일절을 맞는다.

                                                                         ◆ 친일파는 누구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로 인해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해야 할 일을 미루기만 한 탓이다. 옳은 게 옳지 않은 게 되고, 옳지 않은 게 옳은 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기저에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이 깔려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회에서 친일파는 일반적으로 매국노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1905년 뿌리 깊은 친일파의 계보가 출발한다.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에 협력한 권중현·박제순·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공개적인 친일 행보가 그것이다. 이들의 매국 행보는 오늘날까지 친일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을사늑약 후 친일 세력들은 날개 달린 듯 매국의 정점을 향해 달린다.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데 앞장서면서 정미7조약, 한일병합조약에 일조하는 등 망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고야 만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불가능한 민족반역자, 역사에서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이른바 1세대 친일파의 얼룩진 그림자다.

   망국 이후 친일은 104년 전인 1919년 3·1운동 전후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일제는 3·1운동 과정에서 분출된 조선인들의 강한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 후 일제의 식민지배 방향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면서 매국에 초점이 맞춰졌던 친일은 민족정신 파괴로 선회한다. 2세대 친일파의 맹아가 싹을 틔우는 순간이다.

   이 시기 친일은 매국노 자손, 지식인, 사업가 등을 중심으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법원·경찰 등 식민통치 기관에 협력하는 권력부합의 형태로 진행됐다. 물론 식민지배가 길어지면서 독립운동과 애국애족이 생소해진 이들도 친일에 힘을 보탰지만 조선인의 피고름을 짜는데 불을 켜고 부귀영화를 좇으며 식민지배에 협력한 건 다 똑같다. 일제강점기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材)’로 불리며 2·8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음에도 훗날 독립에 회의를 느끼고 변절한 이광수와 최남선, 친일재벌 박흥식 등이 2세대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사다. 해방 후 이들의 변명은 하나같이 ‘일제가 망할 줄 몰랐다’였다.

   1945년 빛을 되찾았지만 이웃과 동족을 배반한 각자의 부역 행위에 대한 죄과를 인정하고 진솔하게 뉘우치는 친일파는 몇몇을 제외하곤 없었다. 독립·조국·민족 등 친일의 경계는 시간의 흐름 속 모호해졌지만 일제에 빌붙어 잘 살았던 이들은,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 살고 있다.

◆ 미완의 친일청산

   과거를 따지는 건 과거의 노예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정지 작업이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나치 부역자를 처단했고 그 후에도 후퇴없이 반인류범죄자를 체포해 엄하게 처벌했다. 과거사 청산에 모범으로 평가받는 독일 역시 서방연합국의 점령 정책과 국제사회 압박 등 외부적 동력과 맞물려 진지한 성찰을 토대로 어두운 역사를 반성했다. 썩은 부분을 수술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울 수가 없음을 확신했던 까닭에서다.

   그러나 식민지배를 벗어나 치욕의 원인을 되새겨 간직해 그런 과정 끝의 광복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계명은 오래지 않아 식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 노력은 시작했지만 친일세력의 치열한 저항, 그들이 필요했던 반공체제와 연대에 의해 좌절되면서다. 1948년 출범한 반민특위는 8개월여 기간 682건의 친일행위를 조사해 408건의 영장발부, 559건의 검찰송치, 221건의 기소로 활동을 마쳤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부분 풀려나 재판이 종료된 건 38건에 불과했다. 실형 선고 7명, 집행유예 5명, 공민권정지 18명 등 30명이 제재를 받았는데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재심으로 다 풀려났으니 반민족행위에 대한 처벌은 대한민국에서 없었던 셈이다.

   2023년 우리나라는 여전히 매국을 해도, 이적을 해도, 쿠데타를 일으켜도 떵떵거리며 큰소리칠 수 있는 나라다. 해마다 이맘때 독립운동과 친일문제가 부각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오늘의 문제다. 그것은 또 걸핏하면 가당치 않게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곤 한다. 이유는 멀리있지 않다. 세기가 바뀐 이 시점까지 친일 청산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일본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고 있어서다. 미완의 과거청산이 남긴 업보다.

   대전 A 대학 사학과 교수는 “광복 이후 미군정 기본정책은 한반도 점령 통치에 방점이 찍혀있었고 친일파 청산이나 민주화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며 “미군정은 점령 통치 안정을 위해 친일 인사를 적극 동원했고 이들은 건국을 주도하는 정치 세력이 돼 훗날 반공, 친미주의자로 변신해 또다른 친일의 뿌리가 됐다”고 꼬집었다.

                                                                                  <참고문헌>

   1. 이준섭, "해방 78년, 도려내지 못한 친일의 역사", 금강일보, 2023.2.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