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이해해야 앞날을 현명하게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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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산문집과 시집을 나란히 낸 유종호(87)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19일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만났다. 1세대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로서 이화여대, 연세대 등에서 제자들에게 ‘말’을 가르쳤던 유종호 교수. 오늘날 잘 쓰이지 않는 말의 역사를 모은 에세이 ‘사라지는 말들’(현대문학)을 통해 다시 한번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 나섰다. 시집 ‘충북선’(서정시학)에는 80살부터 일상에서 느낀 소회 등을 담았다.

   이번 에세이는 유종호가 천착한 역사 복원 작업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1935년생인 그는 초등학교 때 해방을 맞았고, 중학교 때 6⋅25를 겪었다. 경험을 살려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회상기-나의 1950년’(현대문학) 등을 썼다. 그는 “이번 책은 경험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 어떻게 변화했나’ 등에 주안을 뒀다”며 “말의 역사를 통해 우리 언어와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자 했다”고 했다. 또, “최근 구상한 건 아니고 평소 하는 일이라 생각을 해뒀는데, 점점 기억력이 없어지니까 나중엔 다 모를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책에 소개된 단어들은 젊은 세대에게 ‘외국어’와 다름없다. 동지섣달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인 ‘설은살’, 소로 하룻낮에 갈 수 있는 밭의 넓이인 ‘하루갈이’ 등 207개 단어의 역사적 함의, 정확한 뜻에 대해 살핀다. 사전, 신문뿐 아니라 정지용 등 작가 100여 명의 작품을 참고했다. 그는 “이 책에 나온 단어를 20~30대는 전혀 모르고, 당연히 알아야 할 것 같은 40~50대도 절반은 모를 거다”라고 했다. “우리말 중에서도 정말 괜찮을 것들을 지키되, ‘변화’라는 언어의 필연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강간 등의 말을 성폭행이란 말이 대체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도 했다.

   우리 사회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평도 책 곳곳에 녹아 있다. “타인에 대한 기본적 경의가 화끈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다”(177쪽) “민주제는 사실상 기만적인 공치사(功致辭)로 유지되고 변질되고 타락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407쪽) 같은 문장이다. 그는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제강점기 등 과거에 대한 공부 없이 무책임한 방언(放言)을 하는 사람이 많다”며 “말에 예의가 없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들어 쓴 것”이라고 했다.

   ‘흔적 없는 유년을 떠올리려니 /갈데없는 고아 /어디 갔다 이제야 오느냐며 /보강천 수두룩한 물억새가 몸을 흔든다.’(‘증평에서’)

   이번 에세이는 잃어버린 유종호 자신의 과거를 되살려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가 3년 전 찾은 충북 증평에 ‘소년 유종호’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직통버스가 있다는 걸 알고 60년 만에 갔더니 살던 동네를 찾을 길이 전혀 없고 초등학교도 달라졌다.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의 기억력과 과거 환경이 만드는데, 내 정체성의 근거가 없어졌다는 상실감이 들었다”고 했다. 충격을 받아 몸살을 며칠 앓았다고 한다.

   시집 ‘충북선’에는 이처럼 사라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담겨 있다. 충북선은 그가 태어나고 생활한 충주, 청주 등을 잇는 철도 노선으로,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충북선은 여전히 3등 노선 /내 고독의 자연사 박물관 /잃어버린 시간의 잔설(殘雪)이 푸르구나’(‘충북선’)

   늙어감에 대한 소회도 담겨 있다. ‘읽지도 못할 책이 /겹겹이 꽂혀 있는 /책장은 우리 집 애물 /오래된 나의 슬픔이다’(’청실홍실’) 그는 “책에 밑줄을 쳐 놨는데 전혀 읽지 않은 것 같은 때가 많다. 20대 때 내가 좋아했던 시는 지금도 다 암송할 수 있다. 근데 50대가 넘어 읽은 책들은 덮고 나서 한참 후에 펴 보면 생각이 잘 안 나서 슬프다”고 했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우리 속담이 가장 짤막하면서도 가장 슬픈 인생론”이라고도 했다.

   유종호는 “이번 에세이를 쓰며 ‘사전’을 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눈 건강 등이 급속도로 나빠져서다. 그는 “글 작업은 노트북으로 활자를 크게 만들어서 하면 되는데, 사전은 활자가 작아 돋보기로 봐야 했다”며 “한자어의 뜻을 그냥 풀이하는 등 사전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고 했다.

   “노인네 방에서는 물건이 자꾸 없어져요. 돋보기 찾느라 시간 보내고…” 그는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면서도, 과거를 복원하고자 한다. “앞으로 나의 생각을 짤막하게 정리한 팡세 1권을 더 쓸 계획입니다. 1~2년 안에 가능하면 하고, 90살이 넘으면 못 하는 거죠.”

                                                <참고문헌>

   1. 이영관, "과거를 이해해야 앞날을 현명하게 구상한다", 조선일보, 2022.7.21일자. A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