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조총에 쓰러진 수많은 조선 동학농민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6.05 01:24

                                                           조총에 쓰러진 수많은 조선 동학농민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상설 전시관. 임진왜란 때 사용된 왜군 조총과 조선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 등이 보인다. [뉴스1]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상설 전시관. 임진왜란 때 사용된 왜군 조총과 조선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 등이 보인다. [뉴스1]


    1543년(중종 38) 8월 25일, 일본 규슈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사람이 탄 중국 선박이 표류해 오면서 일본에 조총(鳥銃)이 전해진다. 당시 16살밖에 안 된 다네가시마의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種子島時堯·1528∼1579)는 이 신무기에 열광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조총 두 자루를 구매했다. 도키다카는 철장(鐵匠)에게 조총을 분해한 뒤 모방해서 만들 것을 지시했다. 또 가신을 시켜 화약 만드는 법을 배우도록 했다.
 

                                    한·미회담서 거리·중량 제한 해제
                                    임진왜란 참패한 배경 성찰케 해

                                    전쟁 직전까지 “조총에 맞겠느냐”
                                    명군 “화포제작법 알려줄 수 없다”

                                    300년 뒤 죽창으로 싸운 동학군
                                   애국심·열정도 무기 앞에선 무력

    1년여 시간이 지나면서 도키다카는 조총 수십 정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고, 그것은 사쓰마(薩摩·현재 가고시마현)를 거쳐 오사카 등 일본 곳곳으로 전파됐다.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아 신무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데다 도검(刀劍) 제조 등을 통해 일찍부터 축적된 단조(鍛造)와 야금(冶金) 기술 등을 바탕으로 일본의 조총 생산은 급증한다.
 
    조총은 ‘숲속의 새를 쏘아 잡는 총’이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뎃뽀(鐵砲)라고 불렀다. 애초에 조총은 주로 적군의 장수를 저격하거나 위협하기 위해 사용되다가 1551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실전에 활용됐다. 1575년 나가시노(長篠·현재 아이치현 신시로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연합군은 조총수들을 활용하여 기마대와 궁수 중심의 다케다 가츠요리(武田勝賴) 군을 대파한다. 뎃뽀로 무장한 오다군에 무뎃뽀(無鐵砲) 상태의 가츠요리군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총통 등 조선군 화기 압도한 조총
 
당시 조선시대 소형 화기인 승자 총통이다. [연합뉴스]

                                                             당시 조선시대 소형 화기인 승자 총통이다. [연합뉴스]


    조총이 확산하면서 일본 역사가 바뀌었다. 조총이 전래하기 전에 주로 사용되던 칼·창·궁시 등의 무기는 제작비가 그다지 비싸지 않아 경제력이 약한 중소 영주들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총과 화약은 제작 과정이 훨씬 복잡하여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경제력이 탄탄한 거대 영주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더 많은 조총을 확보하여 중소 영주들을 제압했고, 궁극에는 패권을 노릴 수 있게 됐다. 은광 개발과 대외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원을 축적했던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자(霸者)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다.
 
    1587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복을 내세우면서 조총의 총구는 한반도와 대륙으로 향하게 된다. 조선도 1586년(선조 19) 대마도를 통해 조총을 입수했지만 조선 신료들과 무장들은 이 새로운 무기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일본과 사회 환경이 다른 상태에서 장기간 평화를 누렸던 조선에서는 조총이 별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4월, 손꼽히던 명장 신립(申砬·1546∼1592)은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조총에 대한 대비책을 질문받았을 때 “비록 조총이 있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맞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7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휘하의 조선군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이 벌인 싸움은 ‘임진왜란 판 나가시노 전투’였다. 조선군은 참패했고 신립은 전사했다.
 
    조총의 월등한 위력을 목도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조총을 신기(神器)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 조선도 총통(銃筒)이라 불리는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총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어 승자총통(勝字銃筒)은 가늠좌가 없는 데 비해 조총은 가늠좌가 있어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또 조총은 총신이 길어 사거리와 명중률이 승자총통을 압도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선조와 신료들은 조총을 확보하고 사격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전투 중에 사로잡거나 투항해 온 항왜(降倭)들에 주목하게 된다.
 
    육전에서 연패하여 조선은 의주까지 밀려났지만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서 명군이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명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화포의 위력 덕분이었다. 명군은 포르투갈에서 들어온 불랑기포(佛郞機砲)의 일종인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하여 멸로포(滅虜砲)·호준포(虎蹲砲) 등 각종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병풍 그림. 『도설 오다 노부나가』(2002·도쿄 발행)에서.

                                  1575년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병풍 그림. 『도설 오다 노부나가』(2002·도쿄 발행)에서.

     명군은 이들 화포와 화전(火箭)을 발사하여 조총을 무력화시킨 다음 공성전을 벌여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전투 장면을 지켜본 조선 신료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고 연기와 불꽃이 수십 리에 뻗쳤다”고 명군 화포의 위력을 묘사했다.
 
     평양 전투 이후 조선은 명의 화포를 도입하고 그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부심했다. 또 명군 교관을 초빙하여 진법(陣法) 등을 습득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명군 지휘부는 진법을 전수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자신들의 화포를 넘겨주거나 제작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넘겨주기는커녕 이미 1593년 10월 무렵부터 자신들이 가져온 화포를 전부 회수해 가고 있었다. 조선은 화살에 바르는 독(毒)의 제조법도 배우려고 했지만 명군 지휘부는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은 명군 장졸들을 매수하거나, 조선에 잔류했던 명군 도망병을 활용하여 화포 제조법 등을 습득하려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일본군 1명이 동학군 200명 상대
 
    일본군의 조총 때문에 넋이 나갔던 임진왜란 당시로부터 300년이 지난 1894년, 조선은 다시 비극에 휘말린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봉기했던 동학 농민군은 침략자 일본군이 지닌 우수한 무기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한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정과 애국심은 드높았지만 농민군이 가진 무기는 고작 죽창과 조총에 불과했다. 조총 성능은 임진왜란 시기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반면 일본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국에서 만든 무라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스나이더 소총은 사거리와 명중률, 그리고 살상력에서 이전과는 수준이 달랐다. 무기 성능이 워낙 현격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에 일본군 1명이 농민군 200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농민군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고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에 맞서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주의 우금치를 비롯한 삼남 지방 곳곳에서 수만의 농민군이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실제로 농민군 토벌에 참가했던 일본군이 훗날 남긴 기록은 섬뜩하다. ‘농민군이 400m 앞까지 접근했을 때 우리 부대는 비로소 저격했는데 백발백중이라 정말 유쾌함을 느꼈다. 적은 오합지졸이었고 공포에 질려 전진해 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열정과 애국심도 무기 성능의 차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우주센터서 발사한 아리랑3호
 
    2012년 5월 18일, 한국은 인공위성 아리랑 3호를 우주 공간으로 쏘아 올렸다. 지상 685㎞ 상공에서 승용차까지 식별할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지닌 다목적 위성이었다. 그런데 아리랑 3호가 발사된 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당시 인공위성을 우주 궤도로 띄울 수 있는 로켓이 없었기 때문에 아리랑 3호는 일본의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이 제작한 H2A 로켓을 빌려 발사했다.
 
    다네가시마가 어떤 곳인가. 일찍이 1543년, 표류해 온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조총이 전래해 일본 곳곳으로 퍼져나간 ******점이 아니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렇게 확보한 조총을 바탕으로 일본을 통일한 뒤 총구를 조선으로 돌렸다. 더욱이 201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이른바 7주갑(周甲·60년)이 되는 해였다. 임진왜란 발생 7주갑에 일본 조총의 발상지에 자리 잡은 우주센터에서 일본제 로켓에 위성을 실어 발사했던 사실을 돌아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조총 때문에 피를 뿌려야 했던 임진왜란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에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이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와 탄두 중량 제한이 해제됐다. 사거리를 180㎞, 탄두 중량을 500㎏으로 묶었던 1979년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되는 데 40년 넘게 걸렸다. 이미 핵을 보유하고 사거리 1만㎞가 넘는 미사일을 갖고 있거나 만들 능력이 있는 군사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에게는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무기가 빈약하여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지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기를 소망한다.
                                                                                         <참고문헌>
   1. 한명기,  "조총에 쓰러진 조선, 무기 약하면 피눈물 흘린다", 중앙일보, 2021.6.4일자.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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