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반일’ 이전에 ‘항청’, 속국을 거부한 조선의 싸움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5.28 12:39

                                                           ‘반일’ 이전에 ‘항청’, 속국을 거부한 조선의 싸움                                                             


동아일보

日 시각으로 그린 임오군란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을 일본 시각으로 담은 보도판화. 하급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 직원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가운데 그림의 상단에는 일본 공사가 본국에 보낸 전보가 붙어 있다. 조선이 청에 진압을 요청하면서 병자호란 이후 약 250년 만에 청군이 조선에 들어왔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전근대 시기 한중관계는 조공책봉체제하에 있었다. 그런데 악명 높은 이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형식적인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정기적인 사절단 파견과, 중국을 상국으로 대접하는 외교 의례만 지키면 나머지는 거의 조선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었다. 병자호란(1637년) 이후 조선에 청군이 주둔하거나 청의 관리가 서울에 주재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조공 관계는 ‘지배-복속’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관계를 막고자 서로 비호하거나 원조하는 일종의 ‘패트론-클라이언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김봉진, ‘조선=속국, 속방’의 개념사)

    그런데 이런 관계는 19세기 후반 서양과 일본의 대두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주권국가 체제를 확립한 이 국가들이 조청(朝淸)관계의 ‘정체’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계기는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였다.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과 전쟁을 하면 청나라를 침범하는 게 되는지, 청나라는 개입할 것인지, 그 이전에 도대체 조청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청 정부의 답변은 ‘속국이지만 자주적인 나라이고, 자주적이지만 동시에 속국’이었다. 즉, 속국자주(屬國自主)였다. 대등한 주권국가 체제에 사는 현대인들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근대조선의 험난한 여정은 이 말로부터 시작했다. 현대 한국어의 ‘속국’과 달리 당시 이 말의 의미는 매우 애매했다. 조선 같은 조공국은 사실상 독립국이라는 게 당시 조선과 서양, 그리고 일본의 입장이었다.

                                                                       ‘조선 속국화’ 청의 태도 변화

     조선은 조공국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한 채 자주국이 되고자 했다. 조공을 하는 대신 청에는 국제사회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줘야 하는 의무를 지우고자 했다. 하지만 내정간섭은 한사코 거부했다. 청은 “조선이 중국의 보호를 구하는 것은 결코 진심이 아니다. 단지 중국의 힘을 빌려 어깨의 짐을 덜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이때부터 청일전쟁까지 약 15년간은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청과, 이를 거부하려는 조선의 싸움이었다. ‘반일’ 이전에 ‘항청(抗淸)’이 있었던 것이다.

     1880년대 들어 청은 전통적인 입장을 바꿔 조선 속국화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했다. 그 주도자는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그 부하인 마건충(馬建忠), 원세개(袁世凱)였다. 정책 변화의 이유는 청의 위기감이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1876년)을 맺고 이어 류큐 왕국을 병합(1879년)해버렸다. 지난 칼럼에서 서술한 대로 류큐 멸망은 조공국에 도미노 현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프랑스도 베트남을 잠식하고 있었다. 청의 안보에서 조선은 류큐와 베트남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나라였다.

     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조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임오군란(1882년) 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오장경(吳長慶)의 부하 장건(張건)은 고대 한사군의 전례에 따라 조선국왕을 아예 폐하고 조선성(朝鮮省)을 설치하자고 했고, 한림원 시강 장패륜(張佩綸)은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적으로 장악하자고 했다. 이처럼 조선과 청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조선이 이에 저항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조선의 저항에 큰 장애를 초래한 대사건이 일어났다. 사실상의 대원군 쿠데타인 임오군란이다. 이를 진압하고자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청군이 들어왔다. 난을 진압한 청군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갔고 민씨 정권을 다시 세워줬다. 청은 이제 서울에 있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내정에 맘대로 개입했다. 그 선두에 선 게 원세개였다.

                                                                              외교술과 국력의 중요성

    이런 노골적인 간섭에 청과의 관계 자체를 깨버리려는 움직임이 대두했다. 먼저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켜 조공관계를 폐기하고 아예 독립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했지만 청군은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다. 이어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을 밀어내려고 꾀했지만 원세개는 이를 알아채고 그를 폐위시키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김옥균과 고종은 외세에 의존했느냐고 힐난한다. 탁상공론이다. 청의 속국 시도를 막을 아무런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있나. 국력이 갖춰질 때까지는 현란한 외교술로 조선의 ‘자주’를 인정해줄 타국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필사적으로 국력을 키워야 했다. 당시 조선 위정자들의 잘못은 외세 의존에 있다기보다는 빈약한 외교력과 내정개혁 실패에 있었다. 외세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강이 필수적이다. ‘용일(用日)’을 하고자 했으나 ‘친일(親日)’로 전락한 개화파의 말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데다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에서 외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국가’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독립국이지만 미국의 강력한 영향과 간섭을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박정희는 이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빼먹을 건 빼먹고 거부할 건 단호히 거부했다. 역대 미국 정부가 이 두 대통령을 제거하고 싶을 정도로 골머리를 썩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외세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여 국력 강화를 이뤄냈다. ‘자주’에 성공한 것이다.

                                                                           독립문은 淸에서 벗어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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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영은문과 그 옆에 있던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청은 청일전쟁(1894년)이 발발하기까지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방해했다. 매우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강요했고(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사실상 총독으로 군림하던 원세개는 조러밀약을 분쇄했다. 한미조약에 따라 1887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을 미국공사로 임명했으나 청은 ‘주재국에 착임하면 그곳 청국공사와 협의하고 그 지시에 따르라’며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양은 청나라의 방해로 제대로 임무 수행을 못하고 결국 일찍 귀국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조선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청의 야욕이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았고 조선인을 등 돌리게 했으며 청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불러들였다. 개항부터 청일전쟁까지의 한국 근대사는 ‘속국화’에 맞서 ‘자주’를 확보하려는 청에 대한 항쟁이 중심축이었다.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세워진 독립문(1897년)은 바로 그 상징이다.
                                                                                           <참고문헌>
   1. 박훈, "‘반일’ 이전에 ‘항청’… 속국을 거부한 조선의 싸움", 동아일보, 2021.5.28일자.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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