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라의 구성세력 글쓴이 younbokhye 날짜 2010.05.11 10:04
흉노는 2세기 이후 초원에서 사라지고 없음...잔존세력이 5세기 유럽에 나타난 훈족
 
박혁거세는 흉노족이 아니라, 부여유민세력..시기적으로도 흉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
 
박혁거세가 왕에 오르자 거서간이라 칭한 건 아버지가 부여서쪽의 국경을 담당한 왕이였다는 의미가 됨.어머니 파소는 부여공주라고 기록됨(한단고기)...[삼국사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아이로 신화적으로 기록됨..박혁거세세력은 옥저를 거쳐 경주로 들어와 진조선유민세력의 추대를 받아 13세에 왕에 추대됨..그리고 사로국이라 칭하고 진조선유민들의 도읍지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삼음
 
김일제후예들인 흉노세력은 신나라가 망한 후에 산동지역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들어온 세력.이미 한족화된 흉노인들로 김일제 남동생의 후손인 김수로세력은 가야의 왕족이 되고, 김일제 후손인 김알지 세력은 사로국의 세력이 됨. 신나라 화폐들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은 당시 해상무역의 흔적이고,이주했다는 증거임.
 
4-5세기 고구려와 전쟁 중에 이탈한, 모용을 시조로 삼는 선비기마족(전연군대)이 경주지역으로 들어와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김알지세력과 연합하여 신라를 개국함.왕족은 선비족이고 귀족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수 있음.즉 성골은 모용선비족이고 진골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수 있음. 법흥왕 이름이 모진으로 모용과 성씨가 같음. 법흥왕때부터 김씨로 개명하여 김원종이 됨. 신라왕조가 김씨라는 것은 진흥왕때부터 기록되기 시자함.
 
[삼국사기]는 신라사관 김부식이 편집한 기록으로 신라을 우월하게 보는 신라사관이기 때문에 고구려를 비하시킬 수 밖에 없음. 신라에 고구려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는 중원고구려비문내용이나 경주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에게 제사지내는 청동그릇이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명확히 증명해 주는 객관적인 고고학적 사료라 할 수 있음.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에 불과했음.
 
그래서 축소 및 과대포장으로 왜곡.날조시키려는 식민사관이나 지나사관이나 신라사관이 모두 문제라는 것임..역사학이란 객관적 연구가 아니라, 자국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목적으로 역사논리를 내세운다면 그건 역사학이라 할 수가 없음.

부정할 수 없는 광개토태왕비문은 다음과 같이 역사적 사실을 증언한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고증자료]광개토태왕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 제사용 청동그릇-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고구려 석비-중원 고구려비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

중원고구려비는,고구려 장수태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한 눈에도 광개토태왕비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 석비의 높이는 2m3cm, 너비는 55cm으로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이며 자연석을 각자면(刻字面)을 간 다음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한 글자의 크기는 대략 3~5cm정도이며, 사면에 새겨진 글자의 총 수는 730여 자로 추정되고, 판독 가능한 글자는 270여 자 정도이지만, 광개토태왕의 비문의 내용 중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었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를 증명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공부하던 그는, 이 비에 대해서 당시 단국대 박물관장이었던 정영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침내 1979년 4월 8일 그 천년이 넘는 역사가 오늘에 드러나게 된다.


정영호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은 석비 앞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이틀 동안 비문에 낀 이끼를 벗겨낸 후 조심스럽게 탁본을 시작한다.

이 비를 본 교수단들은 분명 “고구려비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나누면서 탁본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이윽고 1차 탁본에서 ‘前部大使者’ ‘節敎賜’ ‘諸位上下’ ‘十二月甘三’ ‘募人三白新羅土內幢主下部授位使者’ ‘蓋盧供○募人新羅土內衆人’ 등의 글귀가 전면(前面)에서 나타났고, 좌측면에서는 ‘辛酉年’ ‘大王國土’ ‘東夷寐錦王’ ‘共軍至于’ ‘古牟婁城守事下部’ 등의 명문이 뚜렷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정단장이나 교수단은 순간 숨이 멎었다. 바로 ‘광개토호태왕비문’의 ‘고모루성(古牟婁城)’에 대한 부분과 고구려의 관직명인 ‘전부대사자 제위(前部大使者 諸位)’ ‘하부사자(下部使者)’ 등이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타난 탁본의 글귀로, 이 땅에서의 고구려비가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1979년 6월 12일자〈한국일보〉의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보도내용이다.『당대의 학자 100여 명은 단국대에서 중원고구려비에 관한 첫 학술회의를 열고 해방 후 최대 수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고구려 석비의 신비를 풀어나갔다.』(중략)


전면의 비문은 거의 모두 판독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부분은 서두로 다음과 같다.


고려건흥 4년 5월중(高麗建興 四年 五月中) 고려대왕조왕(高麗大王祖王) 령환신라매금야(令還新羅寐錦也) 세위원여형여제(世爲願如兄如弟) 상하상지수천(上下相知守天) 동이지매금기태자공(東夷之寐錦忌太子共)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건흥 4년 5월에 고구려대왕(文咨王)의 조왕(장수왕)이 신라의 자비왕(慈悲王)을 돌려보낼 때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상하(上下)가 수천(守天 : 하늘의 도리)할 것을 서로 약속해야 한다는 말에, 동이의 매금(寐錦 : 신라왕)이 공손히 응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부(前府 : 소속부명) 대사자(大使者 : 직명) 등과 주부(主簿 : 직명) 등에게 명하여 신라 경내에서 300인을 모집케 하였더니, 고구려의 당주(幢主 : 고구려의 무관직)로서 그 하부의 사자로 있던 자가 백제왕 개로(蓋盧 : 蓋鹵)와 서로 공모하고 신라 경내에서 사람들을 모집 동원하였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광개토대왕 능비에 나온 문자들이 그대로 이 석비에 나오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구려왕이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매금’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잠자리’라는 뜻으로 상대를 낮춰 부르는 용어인데, 한술 더 떠 동쪽의 오랑캐(東夷) ‘매금’이라며 분명히 문자로 못 박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문 서두에서 보이듯 고구려왕은 형(兄)으로, 신라왕은 아우로, 상하를 분명하게 구분 명기하였다.


결국 중원 고구려비에서 나타난 사실은 오랫동안 신라군의 영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일본서기〉에서도 ‘웅략(雄略) 8년, 즉 장수왕 52년(464년)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도록 하였다.’ (중략) ‘고구려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내의 유성(流城)에 주둔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가 근 100년이 넘도록 신라를 점령하고 신라의 모든 부분에서 직 ? 간접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여 진다.


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호태왕비의 나와 있는 하 평양에 대한 기록,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白殘緯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을 뒷받침 한다.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아닌 한반도 통치를 위한 중심지라고 봐야 되는, 또 하나의 근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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