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동춘당 송준길 이야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0.18 00:00

                                                                                동춘당 송준길 이야기 

드론으로 촬영한 동춘당 종택 주변. 앞이 동춘당이고 그 뒤가 사당인 ‘송씨별묘’이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드론으로 촬영한 동춘당 종택 주변. 앞이 동춘당이고 그 뒤가 사당인 ‘송씨별묘’이다. [사진 백종하 사진작가]

    동춘당(同春堂)은 유학자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호이자 서재 이름이다. 건물은 대전 대덕구에 있다. 동춘당 뒤쪽에는 송준길을 모신 사당 ‘송씨별묘(宋氏別廟)’가 있다. 배위(配位, 부인) 신주에는 ‘증정경부인진주정씨’로 적혀 있다. 동춘당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였다. 그러면서도 동춘당은 당시 대제학을 지낸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가 됐다.  
    요즘으로 치면 여당과 야당의 실력자가 서로 사위와 장인이 된 것이다. 학맥으로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통혼이다. 이 무렵 서인과 남인은 냉랭한 관계였다. 정경세는 송준길을 한 번 만나보고 그 사람됨을 기특하게 여겨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송준길은 당시 김장생에게 수학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장인 문하도 드나든다. 동춘당은 그렇게 열려 있었다. 동춘당은 특히 학맥을 떠나 퇴계 이황을 매우 존숭했다. 그는 퇴계의 학문적 장점이 정상신밀(精詳愼密)에 있다며 퇴계를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동춘당은 세상을 떠나던 해 꿈속에서 퇴계를 뵙고 ‘기몽(記夢)’이란 시를 남긴다.
 

송준길의 친필 시 ‘기몽’. 1672년 동춘당이 꿈에 퇴계 이황을 만난 느낌을 시로 적은 글이다. [사진 대전시립박물관]

                   송준길의 친필 시 ‘기몽’. 1672년 동춘당이 꿈에 퇴계 이황을 만난 느낌을 시로 적은 글이다. [사진 대전시립박물관]

    “평생토록 퇴계 선생 공경해 우러르니/세상 떠나셨어도 그 정신 감통했네/오늘 밤 꿈속에서 가르침 받았는데/깨어 보니 달빛만 창가에 가득하네”  
   동춘당은 주자학을 조선 성리학의 근간으로 세운 것은 이황과 이이로 이해했다. 『국역 동춘당집』의 해제를 쓴 이봉규 인하대 교수는 “그는 학문적으로 이황을 가장 존중했지만 이기(理氣) 등 주요 학설은 이이 입장에 섰다”고 분석한다.
 

송준길이 후학을 양성했던 서재인 동춘당. 글씨는 동지였던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진 송의호]

                                  송준길이 후학을 양성했던 서재인 동춘당. 글씨는 동지였던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진 송의호]

    송준길은 정치적으로는 김상헌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민유증을 비롯한 여흥 민씨 집안 학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해 노론 세력을 형성한다. 이후 17세기가 되면 당쟁으로 발전한다. 당쟁으로 흐른 원인 중 하나가 이른바 예송(禮訟)이다. 예송이란 왕실 의례 적용을 둘러싼 정파적 논란이다. 예제(禮制)는 성리학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장치였다. 예제 수립은 그래서 성리학자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송준길은 예송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노론 입장에 선다. 그는 허목‧윤휴‧윤선도 등 남인 세력의 비판을 방어하는 이론가 역할을 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상사를 주관한다. 상복(喪服)과 관련해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장렬왕후(인조 계비)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선도 등 남인은 3년복으로 맞섰다. 왕통을 계승한 아들을 위해 모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의 논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복제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종법적 위상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즉 효종의 정통성과 직결돼 있었다. 조정은 결국 『경국대전』을 근거로 기년복을 받아들였다. 열려 있는 송준길은 승자가 된다. 그러나 15년 뒤 동춘당이 세상을 떠나자 전세는 역전된다. 노론은 실각한다. 열린 자세의 중요성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참고문헌>
   1. 송의호, " 서인이지만 정적 남인의 딸과 혼인한 송준길", 중앙일보, 2020.9.3일자.  

시청자 게시판

2,114개(8/106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45300 2018.04.12
1973 <특별기고> 연담 이운규 선생의 후천개벽사상과 남학의거운동 신상구 359 2023.02.19
1972 <특별기고> 2023년 정월대보름 맞이 대동 장승제 봉행을 신상구 270 2023.02.19
1971 주역과 천부경의 대가 대산 김석진 선생 타계를 추모하며 사진 신상구 475 2023.02.19
1970 <특별기고> 운초 계연수 선생의 생애와 업적<실존인믈&g 신상구 690 2022.09.15
1969 한국전통문화대 崔英成 교수, 목은 이색 문집서 ‘天符經’ 언급 발견 사진 신상구 821 2022.09.15
1968 세종시 원로서예가 송암 민복기(松巖 閔復基) 선생 사진 신상구 1013 2022.09.06
1967 가난했던 이중섭은 병문안 선물 살 돈 없어 그림 건넸죠 사진 신상구 773 2022.09.01
1966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사진 신상구 681 2022.09.01
1965 백제 ‘은꽃 장식’에 담긴 성왕의 강국건설 의지 사진 신상구 406 2022.08.31
1964 中, 70년 유지 조선족 한글 간판 단속 사진 신상구 370 2022.08.30
1963 지진아 아인슈타인 깨운 3가지...나침판, 바이올린, 토론 사진 신상구 473 2022.08.24
1962 그림자 없는 평등 세상, 장욱진의 이상향 사진 신상구 279 2022.08.24
1961 거문도 사건 전말 사진 신상구 533 2022.08.19
1960 중부권메가시티와 충청문화르네상스 사진 신상구 325 2022.08.18
1959 무속(巫俗)의 허와 실 신상구 563 2022.08.17
1958 위대한 문학은 제도·권력·유행의 경계 밖에서 ‘눈물 닦아주는 손’ 신상구 324 2022.08.17
1957 고려인 최초 정착지에 세운 ‘추모의 벽’, 15人 독립영웅 우뚝 사진 신상구 504 2022.08.17
1956 <특별기고> 8.15광복 77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주요 과제 사진 신상구 347 2022.08.17
1955 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77주년 경축사 전문 신상구 237 2022.08.16
1954 군자금 모금한 의병장 찾았다 사진 신상구 288 202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