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대의 축제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2.06.18 01:12

    

                                                              고대의 축제



수산리 벽화에는 무덤 주인공과 아내가 곡예를 구경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이런 곡예를‘백희잡기’라 부르는데, 재주꾼이 연회에 동원돼 펼치는 갖가지 기예를 일컫는 말이에요. /한성백제박물관
 수산리 벽화에는 무덤 주인공과 아내가 곡예를 구경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이런 곡예를‘백희잡기’라 부르는데, 재주꾼이 연회에 동원돼 펼치는 갖가지 기예를 일컫는 말이에요. /한성백제박물관

  강릉 단오제나 제주 수국 축제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가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어요. 오늘날 '축제(祝祭)'라고 하면 흔히 수많은 사람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서양의 '페스티벌(festival)'이나 '카니발(carnival)'같은 놀이를 떠올리곤 하는데요. 축제라는 말은 '축하하며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고대사회의 축제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어요. 우리나라 고대에는 어떤 축제와 놀이가 있었는지, 왜 그런 축제를 했는지 알아볼까요?
                  춤추고 노래하며 신에게 올리는 제사
  농사가 중요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자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드는 것 모두 신의 뜻이라 여겼죠. 이 때문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주기적으로 축제를 열어 농사의 풍요를 빌거나 수확에 대한 감사를 표했어요. 따라서 고대의 축제는 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신에게 바치는 대규모 제사는 공동체에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많은 정성을 들였고,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극도의 긴장감을 놀이를 통해 풀어냈죠. 사람들은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신을 맞이해 기쁘게 하고,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며, 신이 자신들의 소망을 이뤄주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노래와 춤이 곁들며 축제가 됐고, 신과 가까워지는 동시에 공동체가 함께 즐기는 기회가 만들어졌죠.
  삼국시대 이전 삼한(三韓) 사람들은 씨뿌리기를 마친 5월과 가을걷이(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임)가 끝난 10월에 제사를 치르며 다 함께 춤을 추고 놀았어요. 풍년과 수확에 감사하는 거예요. 떼 지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놀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춘 춤은 수십 명이 일렬로 서서 서로 뒤를 따라가며 추는 식이었는데요. 수십 명이 모여 다 같이 발을 구르고, 손과 팔을 구부렸다 펴면서 추는 집단 춤은 오늘날의 당산굿이나 정월대보름에 주로 하는 지신밟기 춤, 농악의 길놀이 춤을 연상시켜요. 당시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군무를 추면서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지배자들은 공동체의 통합력을 높일 수 있었어요.
                       축제와 재판, 그리고 사면
  매년 12월 부여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열었어요.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국가적인 축제를 지냈죠. 이때도 사람들은 집단으로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를 즐겼어요. 그런데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이런 축제를 개최하는 시기에 죄수들을 풀어주는 '사면령'을 내렸어요. 오늘날 국경일이나 명절에 대통령이 사면을 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런데 요즘과 크게 다른 점도 있어요. 당시에는 전쟁 포로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축제 기간 처형하기도 했답니다. 사면령과 함께 중대 범죄를 처벌한 거예요.
  축제를 열며 재판을 하는 데는 의도가 있었어요. 축제는 신을 맞이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니, 이 시기의 재판을 신이 행한 것이라고 여기게 해 재판의 권위를 높인 거지요. 이런 제사와 재판은 국왕이 주관했어요. 따라서 왕명에 복종하는 것이 곧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왕명에 반하는 것은 곧 신에게 대항하는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확인시킨 거지요. 이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왕권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되기도 해요.
                  벽화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놀이 문화
  시대가 변하며 축제는 제사보다 오락 성격이 강해져 놀이 문화로 바뀌게 돼요. 삼국시대 귀족들이 가장 많이 즐긴 놀이 문화는 사냥이에요. 이렇게 사냥을 통해 잡은 사슴이나 멧돼지는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산이나 강 등 자연을 지배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희생 제물로 바쳐졌어요.
  고구려에서 사냥은 군사훈련이자 체력 단련, 그리고 인물 선발을 위한 축제였는데요. 평원왕(재위 559~590년) 때 혜성처럼 나타난 장수 온달은 국왕이 참관한 정기적인 사냥 대회에서 뛰어난 기마 궁술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지위에 오른 대표적 인물이랍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사냥이나 활 쏘는 그림이 많이 남아 있어요. 덕흥리 벽화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마사희(馬射戱)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말을 탄 채 활쏘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 나무 판과 붓을 든 기록원, 심판으로 보이는 인물,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죠.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parthian sh ot·고대 파르티아 왕조에서 유래된 활쏘기 방법)'은 고구려 기마 궁술의 백미라 할 수 있어요. 파르티안 샷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히는 것은 오랜 훈련과 실전 경험 없이는 불가능해요. 무용총 수렵도에서도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젖혀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답니다.
  오늘날 서커스와 비슷한 장면들도 그려지는데요. 이를 '백희잡기(百戲雜技)'라 불러요. 백희잡기는 전문적 재주꾼이 연회에 동원돼 펼치는 갖가지 기예를 일컫는 말이에요. 수산리 벽화에는 무덤 주인공과 아내가 곡예를 구경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요. 긴 나무 장대 위의 나무다리 걷기,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세 봉과 둥근 고리 다섯 개를 엇바꾸어 던져 올리며 받는 놀이, 작은 수레바퀴를 위로 던져 올리며 돌리는 모습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어요.
  백희잡기 공연을 하는 인물 중에는 눈이 부리부리하며, 코가 크고 우락부락한 서역 계통이 자주 등장해요.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서역계 사람들이 고구려까지 건너왔음을 암시해요. 실제 서역의 노래와 춤, 악기들은 고구려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서역에서 유래한 빙글빙글 회전하며 춤을 추는 호선무(胡旋舞)가 고구려에도 있었다는 기록과 벽화 그림은 이를 잘 보여주죠.
  고대사회의 춤과 노래, 백희잡기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오락으로서뿐 아니라 문화 교류의 연결 고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중국이나 서역과 교류하며 우리의 놀이 문화는 한층 더 다채로워지고 더 세련된 형태로 발전하게 됐답니다.
                        [이백 시에 묘사된 고구려의 춤]
  유명한 중국 시인 이백은 당나라 궁중에서 펼쳐진 광수무(廣袖舞)라는 춤을 보고 '고구려'라는 시를 남겼어요. "금꽃으로 장식한 절풍모를 쓰고(金花折風帽), 백마처럼 유유히 돌아드네(白馬小遲回). 넓은 소매 휘저으며 춤을 추니(翩翩舞廣袖), 해동에서 날아온 새 같구나(似鳥海東來)"라며 고구려의 춤에 찬사를 보냈어요.
  광수무는 소매 넓은 옷을 입고 추는 춤인데, 무용총 벽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벽화에 그려진 무용수들은 소매가 긴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나 품이 넓은 치마를 입고, 몸을 돌리거나 발을 내디디면서 팔을 휘저으며 마치 새가 나래를 펼치는 듯한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어요. 무용수들의 옷차림은 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색깔이나 모양을 달리했고, 반주자는 보이지 않지만 대신 합창대 7명이 함께 그려져 있답니다.무용총에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용수(위쪽)와 합창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한성백제박물관 무용총에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무용수(위쪽)와 합창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한성백제박물관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으로, 동쪽을 보고 있는 매부리코의 씨름꾼은 서역인으로 생각돼요. /한성백제박물관 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으로, 동쪽을 보고 있는 매부리코의 씨름꾼은 서역인으로 생각돼요. /한성백제박물관                                

                               <참고문헌>
  1. 이병호, "죄수 사면과 처형 동시 진행… 왕권 강화 위해서였대요", 조선일보, 2022.6.16일자.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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