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립 선생의 서글픈 사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한암당(寒闇當) 이유립(李裕?, 1907-1986) 선생은 1907년 음력 11월 14일 평안북도 삭주(朔州)군 구곡면 안풍동 구경포 청계령산 아래에서 삭주지역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李觀楫)과 태인 백씨(태천진사 백관묵과 일가) 사이에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철성이씨(鐵城李氏=固城李氏) 시조 이황(李滉)의 35세 손으로 태어났는데, 철성이씨 집안은《단군세기》저자 이암(李?),《태백일사》저자 이맥(李陌), 계연수(桂延壽)의 스승 이기(李沂), 상해임정 국무령 이상룡(李相龍) 등 대대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대가이다.
이유립 선생은 일평생 늘 고독과 세상의 질시와 가난을 적으로 하여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유립 선생은 일평생 올곧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항일독립운동가로, 재야 민족사학가로, 정통국사 광복운동가로, 교육자로 활동하며 조국의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은 자기 자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동향의 오봉록(吳鳳祿, 1903-1981) 지사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오봉록 지사 가족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동년 4월 7일 신안동(新安洞)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는 등 애국사상이 강했다. 그리고 남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립자(紅石砬子)로 옮겨, 3년여를 머무르면서 단학회(檀學會)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에서『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찬한 계연수(桂延壽)를 비롯해 독립운동가인 최시흥(崔時興)·오동진(吳東振)?신채호(申采浩)의 강연을 들었으며, 조선독립소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의민사(義民社)·천마산대(天摩山隊 : 西路軍政署 別營) 등 항일단체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1923년에는 종정산(倧靜山) 아래 정곡(井谷)에 초막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야학당을 설치하고 청소년들의 야간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해 1927년 21세에 6년제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도 천마산대 소년별동대격인 표면 삼육회(三育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김병선(金炳善)과 함께 매일 오후 방과후에 두 시간씩 역사와 상식을 강의하는 한편 윤번토론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과 휴학기간에는 근로작업과 학교림의 정기식수를 하는가 하면, 체육경기대회를 개최하고 <디딤돌>을 등사 발행했다. 그후 최석홍(崔錫弘), 김처원(金處元)과 함께 신간회 삭주지부를 발기하고 결성대회를 하다가 구룡포 왜경에 의해 해산을 당하자 만주로 건너가 한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