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고려 최대의 호국사찰이었던 개태사
개태사(開泰寺)는 논산 8경 중의 하나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천호리(天護里) 108번지 천호산(天護山) 서북쪽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개태사는 936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무찌르고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개국하기까지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이 컷다는 것을 보답하기 위해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4년에 걸쳐 창건한 대 가람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940년에 개태사가 준공되자 화엄법회를 열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은 것으로 보아 개태사는 화엄사찰에 속함을 알 수가 있다.
개태사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셔놓은 진전(眞殿)이 있어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신탁(神託)을 받는 등 고려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었다.
개태사는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우왕(遇王) 2년부터 14년까지 3번이나 방화와 약탈을 당하고, 양광도(楊廣道)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이곳 전투에서 패하는가 하면, 조선조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급격히 쇠퇴하여 500년 동안 폐사(廢寺)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여승 김광영(金光榮 : 大成華菩薩)이 43세 때인 1934년 어느 날 꿈에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개태사 터에 묻혀 있는 삼존석불을 찾아 다시 세우고 사찰을 재건하여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부르다가 태광사(泰光寺)'라고 개명하였다. 최근에 절 이름을 또 고쳐 개태사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때 재건된 사찰은 본래 위치가 아니다. 원 사찰은 현 사찰보다 북쪽으로 약 200m에 위치해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가람이 북에서 남으로 배치되어 있다. 최북단의 대웅전에 삼존석불(三尊石佛 : 보물 219호)이 모셔져 있고, 그 남쪽으로 창운각(創運閣), 삼성각(三聖閣), 철확(鐵? : 충남민속자료 제1호)이 차례로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창운각 서쪽 전면에는 오층석탑(五層石塔 : 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이 위치하고, 오층석탑 좌측의 북쪽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진전(眞殿)이 있고, 우측인 남쪽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사무소, 다실 등이 있다.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 여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에는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장경불사(藏經佛事 :校正)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국가의 변고(變故)가 있을 때마다 중신(重臣)들이 호국기도(護國祈禱)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護國守護寺刹)이다.
김광영 여인이 주지가 된 후 병자들에게 안수(按手)로 치병해 주고 도인(道人)으로 신봉을 받다가 광복 후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용화회(龍華會)를 조직, 유·불·선 삼교합일의 대법(大法)으로 후천 용화세계를 맞이한다는 기치 아래 본전(本殿)에 ‘삼천일지개태도광사(三天一地開泰道光寺)’라는 간판을 붙였다.
이 명칭은 개태사가 위치한 곳이 천호봉(天護峰) 아래에 있는 천호성(天護星)이라 하여 ‘삼천일지’라 하였고, 개태사의 도광(道光)이 세계만방에 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1946년에는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전을 짓고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 불렀으며, 1947년에는 단군상을 봉안하는 창운각(創運閣) 일명 정법궁(正法宮)을 짓고 관운장을 모시는 충의전(忠義殿)도 만들었다.
2. 국조단군 영정을 모셔놓은 창운각
개태사 주지인 김광영이 1947년에 경북 김천 출생으로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의 시주를 받아 세운 창운각(創運閣)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건물로 지붕은 팔작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운각(創運閣)'에서 창운은 '후천의 운을 개창한다'는 뜻이다. 야산은 1947년은 선천(先天)이 끝나는 해이고 48년은 후천(後天)이 시작되는 해로 보았다. 대둔산과 계룡산의 중간에 위치한 개태사를 선천과 후천을 이어주는 곳으로 여겼다. 대둔산에 은거했던 야산은 선천의 마지막 날 산에서 나와 후천을 연다는 개태사에 가서 단군을 받들었다.
창운각 안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고, 우측에는 단군영정과 천부경이 모셔져 있으며, 좌측에는 다가올 환난을 물리치기 위해 관운장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당초 단군 영정은 6칸 짜리 창운각에, 관성제군은 우주당에 모셔졌는데 사찰의 형편 때문에 한 곳에 모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 아래에는 납북통일을 기원하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특히 개태사 경내에 단군전인 창운각을 세운 것은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일 뿐 아니라 전우주를 주재하는 천존(天尊)님이라고 믿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국조단군(國祖檀君) 영정 봉안은 조국의 독립과 남북통일, 세계 평화를 기원하고 있으며, 단군영정 주위에는 백두산 천지사진이 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도 천존님이고 용화불도 천존님이기 때문에 단군천존님과 더불어 한국에 통일의 운수가 열리게 되므로 창건의 주재자는 단군이라는 뜻에서 단군전각도 창운각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창운각에 모신 단군영정은 일제 때 순종의 비인 윤비 집안에 비장되었던 것을 김광영 주지가 직접 인수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개태도광사의 중심 신앙은 미륵신앙이라기보다는 단군신앙으로 보는 것이 옳기 때문에 당연히 창운각에 바치는 치성이 중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