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봉 송익필의 생애와 사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9.27 08:45

                                                                   구봉 송익필의 생애와 사상

 

                                                                                  Ⅰ. 머리말

   龜峯 宋翼弼(1534-1599)! 참으로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다. 李珥나 李滉처럼 學者的 名聲이 있는 것도 아니요.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만큼 그의 學問과 思想, 文學作品이 널리 소개되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양식 있는 哲學者들 사이에서 꾸준히 연구되어지고 朝鮮儒學을 공부하는 初學者들에게 끊임없는 매력을 주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性理學이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공부로만 인식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禮義는 지키는 사람만 불편한 生活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時代에 살고 있다. 과연 최첨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로 지켜나가야 할 公理는 있는가? 공통으로 지향할 理念은 있는가? 또 지식정보사회를 사는 우리는 과연 지식/앎과 실천적 행위를 일치하고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知와 行이 일치된 삶을 살았던 龜峯 宋翼弼 先生의 삶을 주목해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名分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身分的 제약이 있었음에도 性理學을 통효하여 性理學의 開化, 發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단지 앎에서 그치지 않고 生活哲學으로서 道學的 義理를 몸소 修養에 옮기고, 기묘사화 이후 금서였던『小學』의 중요성을 일깨워 修己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고, 義의 실천으로서의 禮論을 밀도 있게 연구하였으며,『家禮』연구의 교과서적 체계화를 시도하여 17세기 禮學의 초석이 되게 한 知識人 龜峯 宋翼弼의 生涯와 思想을 재조명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生涯와 學問的 태도

                                                                     1. 時代的 배경과 苦難의 生涯

   宋翼弼은 礪山人으로 항몽전에서 活躍한 송예의 十世孫으로, 사적으로는 外家인 安氏 一家를 무고하여 기미誣獄(1521)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었던 宋祀蓮(1496-1575)의 사남 일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雲長, 호는 龜峯, 본관은 礪山이다. 학문과 식견. 문장. 재략이 뛰어났으며 그의 형제 인필. 부필. 한필 등도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아우 한필은 백미였다. 그러나 그의 조모가 전 성균관 사례 안돈후의 비첩 출신 첩(중금)의 소생인 甘丁이라는 것에서 신분적 제한이 많았다.

그의 부친은 기묘년에 陰陽科를 거쳐 5품직인 觀象監 판관에 이르렀다. 그의 외숙인 좌의정 안당은 그를 사랑하여 동기같이 대우할 뿐 아니라 모든 가내사를 일임하였다. 출세욕이 남달랐던 그의 부친 宋祀蓮은 자신의 立身을 위해 告變을 일으켰다.(1521 辛巳告變) 그 공으로 안당가의 재산을 차지함은 물론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으며, 선조 초까지 4대를 섬기며 가문은 번창하였다. 송사련의 자식들은 士門과 혼인하게 되었고 딸은 종실 한산수에게 出嫁하는 등 일문의 영화를 누렸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성장하였던 宋龜峰은 中年期까지는 넉넉한 가세 속에 學問에 精進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 死後 훈구세력은 축출되고 士林의 보호를 받은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선조 19년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 송사련은 관직이 삭탈되고, 李珥, 成渾, 鄭澈 등 서인과의 교유로 東人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東人들의 소송 제기로 "안씨 가문의 노예"라는 판결이 나게 됨에 따라 宋祀蓮의 자손들은 환천, 안씨 가의 처분에 맡겨져 생사의 위기를 맡게 되자, 破家 分散하여 禍를 피하게 되었다.

   宋翼弼 가의 수난은 아비의 행위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지만, 환천의 판결은 黨爭으로 인한 피해였다. 國法에 2대 이상 양역에 종사하고, 60년 기한이 경과하면 환천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음에도 이같은 음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봉 조헌이 선조 22년 상소하여 그의 인물됨과 환천의 부당함을 변명하였으나, 동인들이 그에 앞서 "송모가 정철 집에 머물면서 조헌을 교준 하고 있다" 하여 격노한 선조는 宋翼弼 兄弟를 잡아들일 것을 명하여 그들 형제는 한양에 압송되었고, 선조 24년 翼弼은 평안도 희천으로, 한필은 전라도 이성으로 귀양가기에 이른다.

   流配기간 중에도 儒者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자연에 파묻혀 세속적 애락에서 초연한 기상을 보였다. 선조 26년(1593) 9월 마침내 해배되었으나, 유배생활과 임진왜란으로 가속들이 흩어져 전국을 유랑하다가 충청도 면천에 정착하여 講學을 열었다. 그러나 선조 31년(1598) 아내 성씨와 知友 성혼을 한꺼번에 잃고 충격을 받아 아들 취대가 수습해준 서간을 묶어『龜峯集권4』를 편집한 6개월 후인 1559년 8월 향년 66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2. 學問的 계보

                                                                   가. 靜 思想을 繼承한 學問的 태도

   송익필의 학통이나 학문적 계보는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다. 사승한 일도 없었으나 천재적 기질에 근면을 겸하여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중봉 조헌이 그에 대해 "늙어서도 한번 책을 붙들면 불철주야 읽고 연구하는 태도를 간직하였으며, 특히 경에 밝았다." "주자어류를 배송하고 있었다." 평한 것을 보면 학문에 대한 그의 근면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정암 조광조 선생을 흠모하여 사숙하였으며, 조광조의 至治主義 道學思想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는 1593년 희천에서 해배된 뒤 그 곳에 있는 김굉필. 조광조를 모신 상현서원을 奉審하여 양현을 제사하는 글을 지어 학덕을 추모하였다.

   태산처럼 우뚝함이여! 일월같이 빛나고 빛남이여! 생사화복이 뜬구름처럼 기멸하도다. 세상이 변하여 천번 바뀌더라도 생존은 오직 한때뿐이니, 천추가 일조요 일조가 천추라. 천도에는 합하나 인간에는 어긋나니,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탓하랴. 두분 선생이 아니었다면 누가 사도를 넓혔으리오. 멀고 먼 구만 장천에 몸으로 처음 날으심이라. (중략) 왕업이 더욱 어려워지고 오도가 더욱 위태로우나 멸하지 않는 것이 여기 있으니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리오.

   양현들이 화를 입음을 슬퍼하면서도 자신이 영원히 꺼지지 않을 道學정신을 繼承 발전시키겠노라 굳건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짧은 祭文 속에서 도학의 대류를 김굉필 .조광조에게서 찾고자 했다. 그 증거로서 【小學】 【近思錄】을 가장 중시했다. 곧 소학이 수신서로서 체와 용을 정연하게 구비하고있고 【近思錄】이 宋學의 論語라 일컬어 질 만큼 思想的 哲學的으로 根幹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치주의, 實踐儒學을 강조하던 시기에 양서가 가장 존중되었으며 이점이 분명히 조광조의 영향이 컸다 볼 수 있다. 현상윤은 "至治主義 敎化主義. 실천 유학을 힘쓰는 性理學이 흥왕하던 때에 뒤이어 禮學이 제창되는 것은 그사이에 윤리적 관련과 필연적 사세가 없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점에서 宋翼弼이 禮學을 창도한 것은 어쩌면 조광조의 유지와 사상적 맥락을 繼承하여 발전하였음에 틀림없다.

                                                                                   나. 道友관계

   宋翼弼과 친교가 있었던 인물들은 주로 서인계열이 많았다. 이이. 성혼. 정철 등과 친한 道友관계를 맺고 同道志合 했으며 이외에도 토정 이지함(1517-1578), 고청 서기(1523-1591), 김계휘(1526-1578), 이산보(1539-1594), 홍가신 (1541-1615), 안민학(1542-1601) 등이 있었는데 이중에서도 김계휘는 정철과 함께 초기 서인 지도자로서 아들 장생을 宋翼弼에게 從學시킬 정도로 친교가 있었으며 서기는 천출로 宋翼弼과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에 잘 통하는 바가 있었다. 宋翼弼이 李珥. 成渾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신분상의 문제가 제기되기 이전으로 알려졌는데 이이가 자신의 天道 策을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송운장이 고명하니 그에게 묻는 것이 옳다. 라든가 "性理學을 토론할 만한 사람은 송운장 형제뿐이다."하였으며 李珥가 擊蒙要訣을 집필할 당시 일일이 송익필에게 시사점을 물을 만큼 그의 학문과 경륜을 깊이 아끼고 있었다. 모든 학식과 경륜을 갖추었음에도 신분에 얽매어 등용될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세 친구는 안타까워했다. 이이가 평소 건의한 것 중에는 庶孼에 대한 벼슬길의 許通과 奴婢의 終養 등을 중요하게 제기하였는데 宋翼弼에 대한 연민의 정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李珥에 대해 그는 "형이 평소 내가 도체에 본바가 있다 "고 하여 許與하였고, 만년에는 所論이 점차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내가 학문상으로 혹 새로운 견해가 있어, 여러 사람이 의심하더라도 오직 형만은 믿어주었소," 라고 하여 學問的 道伴으로 깊이 사귐을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반면 그는 엄격한 原則主義·名分主義를 고수하였다. 李珥는『小學』을 집주하면서「明倫」편에서 "曲禮曰, 子之事親也, 三諫而 不聽,卽號泣而隨之."에서 隨之를 修行이라 주해하였다. 즉 어버이를 섬김에 세 번을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으면 울면서(어버이 뜻을) 따라 행한다고 하였으나, 宋翼弼은 부모의 처사가 부당할 때는 간함을 들어주지 않더라도 感悟할때를 기다려, 일단 따르면서 운다는 것이다. 이이가 孝를 궁극적으로 順從에 귀결시킨 데 비해, 宋翼弼은 孝란 단순히 순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納善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순종이 절대적 인식이었다면 납선은 古例의 바탕을 둔 것으로서 진보적인 성향을 띤 것이다.

   한편 성혼 역시 宋翼弼의 학식과 경륜을 아끼어 동인들의 음모로 멸문의 禍를 당하여 사방으로 떠돌 때 돈을 모아 속량까지 시켜 주려하였다. 그러나 둘의 관계도 서로의 입장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혼은 송익필이 지나치게 형식을 무시해 버리는 점, 남을 압도하는 의사나 필요이상으로 시사에 적극 간여하는 점에 불만의 뜻을 내비치었으며 송익필은 성혼의 출처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았다. 성혼은 念退를 義理로 삼아 산림에 은거하면서 명철보신의 철학을 생활화하였다.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성혼이 "산야에 묻힌 사람으로서는 언제나 념퇴하는 것이 의리인데 이때를 당하여 갑자기 시사를 극론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말하자, "聖主의 인정을 받고 이미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자처해서는 안될 것이다."고 하여 出과 處를 확실히 구분하고 비방을 방지하는 방법은 세상을 피해 長山幽谷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된 뒤에 말을 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하여, 성혼에게 강력히 出仕 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道友와 交際함에 있어 한결같이 直道로 一貫 하였다. 그는 그의 生活哲學인 直道에 따라 以友輔仁의 공을 이루기 위해 형식적 법도에 구애됨이 없이 責備, 納善의 道理를 다하였다. 나라에 재상이었던 정철에 대해서도 그의 인간적 결함에 대해 기탄없이 藥言을 베풀었던 것이다.

   벼슬을 사양하는 용기로 주색을 금하고, 취여를 밝히는 절도로서 남을 희롱하고 모독하지 말며,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는 편협성을 억제하고, 선을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고, 청백함을 숭상한 나머지 행실을 편벽하게 하지 말며, 동료를 가볍게 여겨 함부로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라.

   지기상합한 정철은 이 규계를 기꺼이 받아들여 수신의 거울로 삼았다. 벗과는 도로써 사귀었으므로 벗에게 책선하여 보인지도를 다하고 형식적 구속에 매이지 않았던 그의 직을 철학으로 삼고 실천으로 옮겨 신직·언직·행직의 삼도를 다하고 이이의 사후 벗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이이를 옹호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일족의 신명을 버리고, 참화를 감수하였던 것이다. 그에 의하여 개도된 직의 철학은 김장생·송시열 등에게 계승되어 조선의 선비 상으로 정립되었다.

                                                                           다. 畿湖學 派내 위치

   宋翼弼은 李珥와 함께 畿湖學派를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성취한 사람은 朝鮮禮學의 大宗으로 받들어지는 사계 김장생(1548-1631), 신독재 김집(1574-1656), 수몽 정엽(1563-1625),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이 중 김장생·김집 부자는 17세기 畿湖學派의 宗匠으로서 文廟에 宗師 되었고 이어 송시열·송준길도 문묘에 宗師되었으니, 그의 학맥에서 사현이 文廟宗師의 영전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송익필의 敎育課程을 보면 『小學』으로 자신을 규율하고 『近思錄』으로 터전을 닦았으며 『朱子家禮』로 生活法道로 삼았다. 특히『小學』과 『家禮』를 爲學의 根幹으로여겼다. 李珥·宋翼弼 兩門에서 배운 김장생은 敎育次第를 정함에 있어 小學→家禮→近思錄→心經→四書→五經의 순으로 그 단계를 엄격히 하였다고 하는데 이점은 李珥가 小學→四書→五經→近思錄→家禮→心經 등의 순으로 규정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김장생이 주자학의 학문세계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근사록의 義理와 四書의 道理보다 小學과 家禮을 선행하였던 것은 송익필의 독서쳬계를 영향 받은 바 크다.

   또 김장생은 자신의 학문이 博學 보다 約禮에 비중을 두었음을 시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博文·約禮 두 가지는 聖門의 學에서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 율곡은 매양 이점을 강조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율곡은 박문에 있어 가장 공이 많지만 약례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르지 못한 바가 있다.

   여기서 博文은 理論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반면 約禮는 實踐적인 의미를 지닌다. 김장생이 博文보다 約禮를 중시한 宋翼弼의 학문체계를 이어받아 原理的 성격을 띤 性理學을 바탕으로 실천적으로 具體化 하는 禮學으로 끌어올려 학문을 集大成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사상인 直思想이 김장생에 啓發되어 송시열이 "直"을 儒學의 핵심사상으로 삼아 사상적 체계를 수립했던 것이다. 宋翼弼의 學文과 思想이 기호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도 그들의 學統을 이이에게 연결시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宋翼弼의 신분이 미천한데다 아버지 송사련의 죄과가 너무 컸고 동인계열로 부터 敵對的으로 거부당했으며 너무나 곧은 그의 성품은 相對的으로 적을 만들기에 충분했으나 畿湖學派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다.

                                                                                    Ⅲ. 사상

                                                                         1. 性理學 체계와 특징

                                                             가. 太極·陰陽 宇宙와 存在를 보는 입장

   性理學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太極에 관한 이론인데 그의 저서『太極門』에 잘나타나 있다. 총81항목에 달하며 일문일답 형식으로 자신의 太極과 性理에 대한 견해를 밝혀놓았는데 태극 뿐만 아니라 陰陽五行·心性論 등 性理學전반에 걸쳐 설하였으며 대체적으로 程朱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설하였다. 주렴계의『 太極圖說』은 인간과 자연을 유기적으로 보아 太極·陰陽·五行으로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고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설정하고 太極·無極·人極이 기본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宋翼弼은 주자의 설을 좇아 太極과 無極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동일한 것이라 하였다. 『太極問』에 無極이면서 太極이라는 말에서 無와 太 두 글자는 첨감할 수 없으며 , '而'자의 뜻은 가벼운 것이다. 積漸·先後·方位의 뜻이 없는데, '而'자 한 글자의 가벼운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새삼 육상산과 같은 의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普遍的으로 太極은 理氣를 포괄한 개념으로 理氣를 지양한 의미에서 太極이 아니면 理氣 자체도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태극은 이기 상대적인 의미에서 理라고만 할 수 없고 氣라고만 할 수 없다. 理라 해도 되고 氣라 해도 究極的인 것이다. 宋翼弼은 相對的인 차원에서 太極을 '理의 尊號' 라고 하여 '理'로 규정함과 동시에, 陰陽의 根底가 되어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 보았다.

   다음, 太極과 陰陽의 관계, 곧 理와 氣의 先後關係 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太極과 陰陽은 二物인가. 아니면 一物인데 이름만 두 가지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周易』과 程子의 말을 빌려 "形而上은 道가 되고 形而下는 氣가 된다. 氣또한 道이고 道또한 氣이니, 도는 氣와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하고 "理가 아니면 氣도 없고 氣가 아니면 道도 없다." 하며 太極과 陰陽이 서로 分離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理와 氣는 서로 分離하지 않으므로 결코 先後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의 말과 같이 形而上으로부터 말한다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반드시 말하고자 한다면 그 선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고 하여 선후관계의 論理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宋翼弼의 太極·陰陽論은 대체로 주자의 설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우주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태극을 存在 즉 陰陽과 動靜 사이에 내재하는 理致로 규정 음양·동정의 공통된 所以然으로서의 主宰性을 전재하면서도 태극·음양의 不可分離性을 파악 강조하였고 또한 주자가 太極(理)을 "淨潔空豁한 세계" 라 하여 形體와 자취가 없고 능히 造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주로 받아들였다.

                                                                           나. 理·氣를 보는 입장

   우주를 理氣二元으로 파악한 최초의 학자는 정이천이었다. 그는 理는 항상 불변한 무한적 존재이고 기는 生生可變의 有限的 존재이며 다시 體用 관계로 보아 '不相離'의 측면을 강조하였고 주자는 不相雜의 측면을 강조하였는데 宋翼弼의 경우 朱子의 純粹二元論은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는 '理氣不相離' 에 비중을 둔다 곧 理는 氣를 주제하는 내재적 기본원리이며 氣는 모든 사물에서의 물질 내지 動的 現狀의 총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理는 氣의 所以然이지만 不能造作의 존재이기 때문에 氣의 流行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理氣는 相須相對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理氣論은 理와 氣를 겸하여 二一分殊를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진연은 비유하여 달이 온갖 내에 비치면 곳곳이 모두 둥글다 하였고 북계진순은 큰 수는 덩어리 하나가 흩어져 몇 만 개의 작은 덩어리로 되어도 낱낱이 모두 둥글다고 비유함으로써, 만도 되고 하나도 된다고 하였다.

   이는 朱子가 이른바 '總體一太極', '各具一太極' 이라 한 것과 다름이 없다. 理의 本體와 流行을 二一(體)과 理 分殊(用)으로 보았다.

   이상에서 理氣에 관한 그의 견해는 논리상 二元的이나 實在로는 一元的이다. 다시 말하면 '二元的一元觀' 인 것이다

                                                                                  다. 心性論

   人間의 心·性에관한 논의는 韓國의 성리학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先祖 들은 내면적 입장에서 문제를 인간에게 보다 절실한 방면으로 눈을 돌려 17세기 활발하게 꽃을 피웠던 禮學의 思想的 밑바탕이 된다.

   宋翼弼은 "대저 未動은 性이요, 已動은 情이다. 未動과 已動은 모두 心이니 心이 性情을 거느리는 까닭이다. 이것을 물에 비유한다면 心은 물과 같고, 性은 물의 고요함과 같으며, 情은 물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고 하였다. 또 心을 理氣의 합으로 보고 性을 理, 情을 기에 대비 시켰으며, 性情은 心의 體用관계로 파악하였다.

   또 그는 "性은 理이고 知覺은 氣이다."하여 정이천 이래 '性卽理'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장횡거는 성을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으로 ,정이천은 義理之性과 氣質之性으로, 주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이란 이성적인 성을 말하고, 기질지성이란 刑器에 속하는 感性的인 性을 말한다. 곧 전자는 인간 의 普遍性이요, 후자는 各人의 特殊性임을 밝혔다. 송익필의 경우 기질지성을 氣質과 理를 연관시켜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두 가지 성이 아님을 강조하며, 性을 道德實踐의 가능근거로 파악하였다.

   李珥와 宋翼弼은 선조12년(1579)부터 '習與 性成' 의 문제로 수차에 걸쳐 논변을 벌렸는데 그 내용은 '習與性成'에서 性을 本然之性으로 보느냐 氣質之性으로 보느냐 하는 것인데 李珥는 기질지성으로 송익필은 본연지성으로 파악 '습관'의 인위성을 배제하고 '自然性'을 강조하여 제2의 天性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 性에서의 善惡문제를 살펴보자. 그는 "性이라고 할 때는 善惡을 구분할 수 없다. 곧 성은 선악으로 구분될 수 없고 순수한 善뿐이다." 그러나 氣稟이 제한을 받게되면 기질이 각각 달라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데, 선악의 구분은 주렴계의 『太極圖說』에서 '五性이 感動하여 善惡으로 나뉜다.' 라 본 것처럼 靜이 發動하여 선악이 구분되므로 바로 기질지성이 있음을 알게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五性이 감동하여 선악으로 나뉘는 것을 '畿'라 하였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의 조짐 이른바 '畿善惡' 畿에는 선과 악이 相對하고 있으므로 善惡의 幾微를 잘 살펴서 善畿를 存하는 것이 修養에 있어 중대하며 人心道心說, 修養論 전반에 걸쳐 기저를 이루고 있다.

   性은 道의 形體이고 心은 性의 부곽이며 身은 心의 區宇가된다. 내재한 성은 靜으로 中·正 하여 至善인 仁義禮智의 四聖이 되나 發하여 情이 된 것을 총칭하여 七情이라 부른다. 喜怒哀樂愛惡慾인 七情은 氣의 不在로 善·不善을 겸하고 있다. 여기에 純粹至善인 四端의 소재성이 문제가 된다. 四七 論爭의 담당자였던 李滉은 理氣不相雜의 입장에서 立論하여 주장하였고 이이는 기대승의 理氣不相離의 입장에서 더욱 발전시켜 氣發理乘一途說을 主張 하였다. 宋翼弼은 李珥와 같이 四端·七情을 분개하는 것을 反對하고 칠정은 정전 체를 통괄한 것으로 理氣를 謙下여 善惡을 內在하고 있는 것이고 사단은 정의 일편을 든 것으로 理一邊을 들어서 순선의 狀態로 把握하였다. 곧 理氣를 분개할 수 없는중 七情은 全體요, 四端은 七情중 리를 偏重的으로 보았을 뿐 二元化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단에 중점을 두고 칠정과 구별하여 더 큰 가치를 부여한 것은 인간의 고유한 本性을 回復하려는 데 주력하고 善을 지향하는 禮學의 사상적 저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人心道心設에서 宋翼弼의 論理는 四端七情論의 論理를 그대로 繼承하여 '人心包道心'의 論理에 立脚하여 人心·도심의 관계를 "道心은 四端이고 人心은 사단·七情의 總稱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人心과 道心을 일심의 作用으로 把握 즉, 일심의 作用에 의해 人心과 道心으로 나누어지며 고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人心이 일심의 주가 될 수 있고, 道心이 일심의 주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곧 人心도심의 終始, 즉 人心이 道心으로, 도심이 인심으로 變化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이의 말과는 差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라. 修養論

   儒家의 修養論, 卽 敎育論은 氣質의 變化를 뜻하는 것으로 本然의 性을 回復하는 것이다. 發而中節의 和를 얻어 氣가 언제나 理性의 支配를 받아 行動의 中을 잃지 않아 天人合一의 理想이 實現되고 聖人이 되는 것이다. 道를 닦는 것이 敎요, 敎는 氣質變化를 말하는 것인데 이 변화를 설한 것이 『大學』과『小學』이라고 그는 말했다. 교육의 목표는 心性回復이고 그것은 天人合一에 도달함을 말하고 그 선제조건으로서 지와 예를 들어 지를 통하여 心性의내실인 이를 알고 이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 예 인 것이다.

   송익필은 入人極을 定으로 해석하고 있다 極이란 다한 곳으로人極은 盡性이며 입인극 이란 성을 알아 性體를 回復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定은 精·敬과혼용 하기도 하는데 그는 敬을 바탕으로 한 敬而直內 義而方內를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다. 敬은 主一無適,즉 하나를 주장하여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하나는 誠이며 體요, 敬은 用으로 動靜을 일관한다. 경은 內를 直하게하는 것으로 持守공부가 되며 直心을 뜻한다. 그에게 있어서 直은 古今生化를 일관하는 인도의 바탕이다. 直을 실천을 통해 번쇄한 理論보다 行動으로 실천하는 것을 聖性의 길로 보았으며, 즉 內誠을 통한 直의 道가 군자의 바탕이라면 군자의 완성은 義以方內이다. 그러므로 直의 실천은 예로써 발현되며 禮는 轉凡入聖의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直의 실천으로서 禮를 중시한 그의 사상은 김장생, 송시열 등을 거쳐 보다 심화 되어갔으나 『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한 송익필의 禮는 고정적 질서를 강조한 나머지 춘추대의를 주장하고 고질적인 禮論으로 발전할 단서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일면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 예학 사상

                                                         가. 宋翼弼 禮學 思想의 특징(直의 生活化)

   宋翼弼이 활약했던 16세기 후반은 己卯·乙巳士禍를 거치며 士類들이 학문에 침잠함으로써 사상적인 발전을 가져와 한국적 성리학의 체계가 수립하게 된다. 이 같은 학문과 이론의 발달과정에서 실천을 필요로 하는 예학의 탄생을 보게 된다.

   송익필은 이이가『小學集註』와『擊蒙要訣』간행함에 문답을 통해 이해를 돕고, 실천에 힘써 禮學派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모든 수행과 행동의 범주를 이에 귀속시켰다.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로의 회귀는 인욕을 막아 천리를 회복하는 것으로 그 방법으로서 예를 실천하고 예의 내실로써 '경'을 중시하였고, 경을 통하여 直內를 지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리의 회복이란 '直'을 뜻하며 행동의 바름을 가져오는 실천 중심의 예학이 직의 철학에서 온 것이다. '直' 의 철학은 이황의 '敬'의 철학이나, 이이의 '誠' 의 철학에 비해 실천과 행위를 중점을 둔 것으로 퇴계와 율곡의 학문이 형이상학적인 이기심성론을 발전시킨 데 반하여, 송익필의 直의 哲學은 실천을 중시하는 禮學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는 直을 天地의 精氣요 正理니 天地간의 一元之氣도 直이요, 人間의 浩然之氣도 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행동거지가 항상 法規에 맞는 當爲性 예의 附合됨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일정한 規則에 매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함을 쫓는 當爲性을 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李珥가 形式성을 固執함에 반하여 時中을 주장함으로서 行爲의 合理性을 따르고자했다. 宋翼弼은 『주자가례』를 現實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예를 普遍化시키고 大衆化시키는데 기여하며 禮學 성립이 可能하게 했다.

   그의 禮義 實踐은 存心, 養性을 통해 '中節 不中節'의 가변성을 가지고 있는 정을 절제하며 和를 이룸으로써 達道의 境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放心에서 오는 人慾을 머리에 끼는 때에 譬喩 하루라도 빗질하지 않으면 더러운 때가 다시 생겨남으로 천살이나 되는 고운 빗으로 매일 빗질을 하여 마음을 밝게 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매일 빗질을 함은 愼獨과 省察을 生活化하는 敬을 뜻하는 것이다. 直을 통한 禮의 生活化, 敬을 통해 修己하며 行爲의 實踐으로서 禮로 행함은 그의 思想에 中核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나. 喪禮를 통한 系統의 確立

   송익필은 禮의 핵심을 敬身과 효를 내용으로 복을 받는 종교의식을 겸하는 상례와 제례에 두고 있다. 이 까닭은 질서인 통을 확립하고 경신을 하기 위함인데 通이란 死者와 親疎를 정하고 承繼를 결정하는 것으로 家父長的 家族倫理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 관료 사회에서 대의명분에 속한다. 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는 『朱子家禮』를 儀禮로 사용하면서 從法의 絶對性을 주장하였으며, 이기심성론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禮儀 實踐은 中國보다 오히려 徹底하였으며 朝鮮初期부터 시행된 庶孼 差待法도 종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이의 庶母位次문제로 종법이 擧論되었는데 李珥가 父親喪을 당하고 그의 서모를 祭祀를 비롯한 각종 儀禮에서 주부의 서편으로 조금 앞에 서게 하여 북향하는 嫡母의 자리를 피함으로써 명분에 저촉되지 않고 주부보다 조금 앞에 섬으로써 존중의 표시로 생각했다. 그러나 송익필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린 이와 같은 행위는 부당하다보고 집안의 존비질서를 구분하는 강례장에 서모를 참여시키지 않고 별실에 처하게 하여 존승을 다하면 혐의를 피하고, 예도 다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사로운 정보다 統인질서를 기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朱子家禮』에 充實한 그는 服制에서 제외된 庶母에 대하여는 존승하면서도 父統으로 服制의 차가 없는 서형제를 奴隸視하는 當時 풍조를 不當하다 主張하여 朝鮮初期이래 고수되어온 庶孼車臺의부당성을 주장하여 그의 思想이 革新的인 一面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송익필의 禮學은 『주자가례』에 根據하여 적서의 차별이 없는 序列 중심의 통을 수립하려한 것으로 그의 思想的 根幹인 도사상과 禮儀 근본 정신인 和의 思想을 구현시킨 것이다.

                                                                     다. 제례를 통한 人和의 完成

   제례는 조상을 추모하는 행사로 追養과 繼孝를 뜻한다. 곧 생전에 미흡했던 봉양과 다하지 못한 효도를 하여 은혜를 갚고 , 근본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제례는 신과 사람과의 교접으로서 그 수행과정은 례를 행하는 집합체인 것이다. 그 시행 과정에서 예를 익히고 명분과 질서를 확립하고, 일족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盡心至誠하는 수양의 극치가 된다. 끝으로 제례는 복을 받는 절차가 따름으로써 儒家의 결함인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신과 사람간의 화를 도모하는 제례는 일족간의 화를 도모하는 (제례 후 제물을 分食 함)으로 끝맺는다. 이는 사람을 다스리는 道와 같아 勤政 이라고 하였다. 상하의 질서 속에서 효를 가르치고 ,귀천을 분별하는 데서 忠을 보이며 名分을 밝히는 속에 化를 도모하고, 경을 다하는 예로써 끝을 잘 맺는 이른바 善終에 속한다.

   송익필이 제례를 중시한 것은 誠敬으로 일관하고, 統을 수립하며, 명분을 지키면서 人和를 도모하는데 있다. 誠敬은 인욕을 단절하고, 天理를 유행케 하여 대사가 순조롭게 되고 신과 사람의 관계를 조화시키는 存心養性이 그 목표점이 된다.

                                                                                Ⅳ. 맺음말

   以上에서 宋翼弼이 微賤한 家門에다 父親의 허물로 세상에 버림받았으나 뛰어난 才質, 깊은 學文, 禮義 實薦으로 많은 이들의 龜鑑이 되었다. 그의 生涯와 思想을 論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再考 할만한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기며 이 글을 가름 하고자 한다.

   첫째, 학문을 대하는 그의 態度이다. 그는 天才性을 지니고 태어났음에도 쉬지 않는 근면함으로 學問的 成就를 해나갔다.

   둘째. 그는 앎을 실천하였던 知識人이였다. 知와 行을 함께 하며 살아가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더욱이 性理學이 形而上學으로 치달았던 朝鮮조 中期에 時代的 상황 속에서 實踐을 통한 認識에 힘썼던 宋翼弼 先生! 참지식을 生活에 適用하여 직을 철학화 해 나갔던 그는 참지식인 이였다.

   셋째. 주어진 상황을 끊임없이 開拓 해나갔던 哲人 이였다. 修己治人을 儒者의 본령으로 認識하고 治人의 바탕이 마련되었음에도 그의 身分的 제약, 父親의 過誤 는 平生 멍에로서 작용하였으나 그의 지기 이이, 정철, 성혼 등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 하려고 노력했으며 著述과 後進의 養成에 전념하였다.

   넷째, 그의 思想에 中核을 이루는 禮에 대한 새로운 認識과 照明이 필요하다. 그의 예학 사상은 우리가 통상 귀찮아하는 그런 방식의 禮가 아니라 한 人間이 人間다움을 유지해나가는 지름길로서 그것을 통해 人和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1.『龜峰集』, 1622.

   2.『龜峰先生集』(運谷集 附. 木版本), 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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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현상윤,『조선유학사』, 서울:동아학연사, 1975.

   6. 금장태,『유교와 한국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80.

   7. 김용식,「송구봉의 심성관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8. 이문주,「사계 김장생의 예설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대학원 석사논문, 1982.

   9. 배상현,「구봉 송익필과 그 사상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경주대학 논문집』, 1982

  10, 배상현,「조선조 기호학파 예학사상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1992.

  11. 최영성,「구봉 송익필의 사상 연구」, 성균관대대학원 석사논문, 1992.

  12. 홍용표,「龜峯 宋翼弼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13. 장산,「구봉 송익필의 생애와 사상」, 20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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