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알이랑이다....알은 우주만물을 비추어 낳고 기르는 모성적인 태양(광명 상징)
알이랑은 혼돈스러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광명(양심.환한님)과 함께!를 의미한다.
우주만물의 근본-3색 쿼크 구조(3색 합일이 백색)
한민족이 백의를 선호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배달계 무궁화(백색)
빨강.파랑.초록 3가지 색이 물감으로 합일되면
고구려 조의선인이 입은 옷색깔인 검정색이 된다.
고구려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조의선인들(검은 색 의상)
한민족의 3태극(우주만물의 근원구조-3색 쿼크)
[보도자료]절정의 미모를 겸비한 쇼킹한 가창력으로 13억 중국인들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미국 언론에 까지 조명 받고 있는 김미아는 조선족 출신이다. 작년 말 중국 관영 CCTV가 주최한 스타탄생 프로그램 '싱광다다오(星光大道)'에서 테크노 풍의 한국민요 '新아리랑'을 열창해서 무려 3천명이 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종 우승자가 된 '얼짱'가수 김미아는 SBS‘스타킹’을 방문하여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신 아리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료]한ㅁ민족 공동체- 조선족
한민족의 아이콘인 청동검.고인돌.온돌이 집중분포되어 있는 만주는 본래 한반도와 함께 한민족의 터전이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부여가 개국된 지역이며, 기원전 37년에는 부여를 계승한 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한 지역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흉노.선비계의 나라인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 일부가 말갈족과 연합하여 대중상의 대진국(발해)를 개국한 지역이기도 하다. 대외외교문서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라 표방한 대진국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 연해주 지방을 통치하였다. 대진국이후, 고구려계 대진국 황족과 유민의 일부는 고려로 귀의하고 나머지는 선비계 거란의 지배하에 있다가 여진족으로 불리우며 중국대륙을 지배한 금나라(청나라)를 개국하였다. 청나라는 만주를 조상의 땅으로 인식하며 백두산을 신성시했다.
중국인들이 높이 추앙하는 주은래는 청나라로 인해 중국의 영토가 커졌으며, 동북지역은 조선의 역사라고 중국의 국수주의 사관을 비판하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미리 한국인들에게 공식사과했다.
17세기 말경부터 조선인의 일부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조는 동북지역을 조상들이 유래한 곳이라 하여 비워두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이주하기 쉬운 여건에 있었다. 이들은 화전등으로 밭을 일구거나, 인삼등을 채집하였다. 1869년에는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오게 된다. 따라서 때때로 청나라와 조선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간도라 부르고, 압녹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 불렀다. 청나라 영내로의 조선인 유입은 1885년에는 만주로의 이민 금지가 철폐되어 더욱 증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합병되자, 일제의 토지수탈의 결과 토지를 잃은 조선 농민,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사람들등 다채로운 계층에서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31년 7월 2일에는 만주 길림 성 장춘현 삼성포(중국어: 三姓堡 싼싱바오[*])에서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7월 15일에는 김이삼 기자가 길림의 우마황 동아여관에서 피살되었다. 1932년에 오족협화(만주족, 야마토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를 내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의 이민정책으로 만주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또한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간도 지역 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 다양한 직업의 조선족이 흩어졌으며, 만주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300만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만주국의 붕괴와 조선의 독립에 의해 다수의 조선인이 귀국하였으나 약 100만이 중국 내에 남았고, 이들이 현재의 조선족의 기원이 되었다. 조선족은 언어와 문화가 동일한 우리의 한민족의 일원으로 민족통일과 함께 품어야 할 동포들이다.
중국인들이 높이 추앙하는 주은래는 청나라로 인해 중국의 영토가 커졌으며, 동북지역은 조선의 역사라고 중국의 국수주의 사관을 비판하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미리 한국인들에게 공식사과했다.
17세기 말경부터 조선인의 일부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조는 동북지역을 조상들이 유래한 곳이라 하여 비워두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이주하기 쉬운 여건에 있었다. 이들은 화전등으로 밭을 일구거나, 인삼등을 채집하였다. 1869년에는 한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오게 된다. 따라서 때때로 청나라와 조선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간도라 부르고, 압녹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 불렀다. 청나라 영내로의 조선인 유입은 1885년에는 만주로의 이민 금지가 철폐되어 더욱 증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합병되자, 일제의 토지수탈의 결과 토지를 잃은 조선 농민,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사람들등 다채로운 계층에서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1931년 7월 2일에는 만주 길림 성 장춘현 삼성포(중국어: 三姓堡 싼싱바오[*])에서는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7월 15일에는 김이삼 기자가 길림의 우마황 동아여관에서 피살되었다. 1932년에 오족협화(만주족, 야마토족, 한족, 몽골족, 조선족)를 내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의 이민정책으로 만주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또한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는 간도 지역 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 다양한 직업의 조선족이 흩어졌으며, 만주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300만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만주국의 붕괴와 조선의 독립에 의해 다수의 조선인이 귀국하였으나 약 100만이 중국 내에 남았고, 이들이 현재의 조선족의 기원이 되었다. 조선족은 언어와 문화가 동일한 우리의 한민족의 일원으로 민족통일과 함께 품어야 할 동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