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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람들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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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진행 프로그램의 주요내용 입니다.
 
 
 
 
 
 
 
1부 베토벤
 
베토벤의 음악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힘있고 감동적이다. 그는 아홉 곡의 교향곡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그 명성만큼 압박감 또한 심해서 신경질적이면서도 유약했던 베토벤은 심한 고통과 극심한 자기불신을 겪게 된다. 이것은 베토벤의 성격이 그의 음악만큼이나 과격하고 극단적이며 까다롭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많은 부를 얻은 후에도, 거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귀족 후원자들의 고상한 취미를 경멸한다. 하지만 인민 당원으로서 이렇게 반귀족주의를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귀족 혈통임을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법정소송에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파워풀한 음악의 창조자인 그가 40세의 나이에 귀머거리가 됐다는 점이다. 사랑의 실패에 대한 우울함, 후원자와 지지자들을 대하는 변덕스럽고 과장된 행동, 그리고 소외감과 외로움... 베토벤의 성격은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복잡하고 심오하다.
 

2부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반영 항쟁의 방법으로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불복종, 비협력 운동을 벌여 인도의 독립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일대기.
 
1869년 인도의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여 런던으로 유학하기 전까지의 성장기로부터,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귀국하여 개업하기까지의 런던 수학기, 1893년 남아프리카로 건너가, 인도인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대우를 실감하고 저항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애와 인간애에 눈뜨게 되는 위대한 영혼의 탄생기, 1915년 조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결심으로 귀국하여 인도 민족의 자존과 각성을 촉구하고, 시종일관 비폭력주의를 주창하며 반영 항쟁을 독려한 독립 운동기,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지만 고질이던 종교분쟁으로 인해 이슬람교 파키스탄과 힌두교 인도의 두 나라로 분열되는 슬픔을 당하고, 1948년 급기야 힌두교도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위대한 영혼의 황혼기까지를 살펴보며, 인종 차별과 압제에 투쟁으로 벌인 사티아그라하 운동,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 도야와 수련, 외세의 배척을 표방하며 장려한 수방운동, 소금 대 행진, 힌두교와 이슬람의 융화를 목표로 전국을 순회한 평화의 행진 등을 조명한다.
 

3,4부 존 F. 케네디 1,2
 
한 사람이 어떻게 전 미국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수백만의 미국인들을 움직여 조국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 존 F. 케네디는 미국 국민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준 사람으로 언제까지나 기억될 것이다. 인간이 달에 갈 수 있다는 꿈 같은 목표를 세웠고, 평화 봉사단을 창설해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미 국민으로 하여금 개발 도상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존 F. 케네디는 미 국민에게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긍지와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어떻게?존 F. 케네디는 이전의 다른 대통령과는 많이 달랐다. 카톨릭 신자라는 것, 젊다는 것, 침착치 못한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은 모두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에겐 약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예리한 지성과 재치, 그리고 격의 없는 유머 감각이었다. 케네디는 이런 장점으로 평생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속성과 그의 결단력이 결합하여 자신의 앞에 가로놓인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병약했던 유년 시절과 청년기를 통해 다섯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그는 언제나 건강의 화신처럼 보였다.
 
22살 때, 케네디는 독일군에 의해 격침된 영국 여객선 SS 애트니아 호의 생존자들을 위로하면서 학생 외교관으로 박수를 받았다. 2차 대전 직전에는 세계의 역사에 매료되어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해군으로 참전하여 어뢰정 정장으로 복무하면서 격침된 배에서 부상당한 부하들을 구해내 전쟁 영웅이 되었다. 역사에 대한 애정은 케네디를 뛰어난 역사 작가로 우뚝 세웠다. 하버드 대학 졸업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상원의원 시절에 쓴 <용기 있는 사람들>로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생을 치열하게 산 사람이었다. 마치 시간과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위험과 맞닥뜨렸으며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이 정열적인 남자의 출생부터 마지막 운명의 날까지를 추적해보고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되새겨보자.
 
 
5부 블랙 아메리카의 대통령, 말콤X
 
말콤 X는 재즈 시대에 태어났다. 당시는 인종주의가 활개 치던 시대라 '니그로'라 불렸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2류 시민이었고 대부분 투표권이 없었다. KKK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됐다. 흑인들은 미국에서 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양키들을 "파란 눈을 가진 악마"라고 표현하며 흑인으로서의 독립된 주체성을 가지고 흑백분리와 독립이라는 명제로 미국백인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나이, 말콤 X.
 
말콤 X의 '엑스'라는 성은 그가 회교(Black Muslims)에 입교하면서 붙인 것이었다. 당신 흑인 회교도들은 자신들의 성이 원래 그들 조상의 것이 아니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옛날의 백인주인들이 멋대로 붙여주었던 것이니 만큼, X자를 써서 흑인의 빼앗긴 이름을 상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콤은 1925년 5월 19일 미국 중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6남매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였으며, 신자들을 상대로 선조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할 것을 설교했다. 이 과정에서 말콤의 아버지와 다섯 형제는 광신적 백인 우월주의 폭력 단체인 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도 산채로 선로에 놓여져서 두동강으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의 세 명의 형들도 차례로 살해되었다. 혼혈이었던 어머니 루이즈는 이 일로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주 복지국 직원들이 어느 날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말콤과 남은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그 후 말콤은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해 거리를 떠돌다 렌싱 소년원을 거쳐 8년제 중학교 들어갔다. 그 후 말콤은 흑인 빈민가를 떠돌며 도박과 범죄, 마약을 일삼으며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별 볼일 없는 건달에 불과했다. 하지만 회교로 종교를 개종하면서 말콤은 180도 바뀌었다.
 
그는 교도소에 수감된 5년 동안 거의 모든 명저와 사상가, 찰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리고 혁신적인 흑백 분리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던 마틴 루터 킹과 달리 과격하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흑인과 맞섰다. 그리고 백인의 편에 서 있는 배부른 흑인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결국 그는 1965년 연설 도중 흑인괴한의 총에 암살됐다. 사실 생존시에는 흑인들조차 대부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흑인들의 추종을 받는 최고의 흑인 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6,7부 에브리햄 링컨 1,2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 불렸던 사람의 개인적인 삶은 어땠을까?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부모들은 어떻게 그의 야망에 불을 붙여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심을 얻게 했을까? 링컨이라는 인물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적 업적과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도 알아본다. 남북전쟁에서 북부 연합군을 지휘했고 그 과정에서 노예들을 풀어주었던 대통령으로서 링컨의 업적은 실로 전설적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켄터키 오두막집에서 미비하게 시작해 백악관까지 들어갈 수 있었을까? 링컨의 인생사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정규 교육이라곤 1년도 못 받은 시골 소년이 독학으로 성공적인 변호사가 되어 마침내 기념비적인 명연설을 하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미국적 비극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약속이 어느 때보다 큰 빛을 발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있을 때 쓰러진 지도자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신화와 동상 뒤에 숨겨진 링컨의 개인적인 모습을 살펴본다. 황야에서 자라나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절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외부 세계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자신의 외모와 교육법에 거북해했던 젊은이는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학과 법을 선택한다. 여자 앞에서 심하게 부끄러워하던 남자, 그의 결혼생활은 "생지옥"이라 불렸다. 그리고 링컨은 계속되는 가족의 비극을 감내해야 했다. 링컨의 이런 개인적인 모습들은 그의 대중적인 성공과 실패, 노예제를 둘러싼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논쟁, 위기 속에서 내렸던 절실한 결정과 그로 인해 발발한 남북전쟁, 경험도 없이 한 정부와 전쟁을 이끈 노력 등에서 보여진다.
 
흑인들을 점차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결국 자신의 암살을 자초했는지 살펴본다. 또한 그가 어떻게 여론을 감지해서 노예해방을 현실화했는지, 그리고 기회의 땅 미국에 대한 믿음으로 어떻게 북부 연합군의 열렬한 투사가 됐는지, 또 주위의 비난을 이겨내며 전쟁에서 어떻게 단합된 힘을 이끌어냈는지도 알아본다.
 
 
8부 근대과학의 아버지, 뉴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하는 아이작 뉴턴. 그는 중력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 전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학에 대한 열정으로 연구에 몰두해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떠했을까?
 
스물 세 살에 이미 중력의 법칙과 운동과 관성의 법칙의 기초를 놓고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이론을 확립하고 빛에 관한 실험을 했던 그는 마침내 <프린키피아>라는 저작을 내놓아 과학의 정상에 올라선다. 그러나 평생을 통해 수많은 성공을 거두고도 그는 단 한번 밖에 웃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사교생활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살면서도 오락을 전혀 몰랐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생활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경제학자 케인즈는 그를 인류의 마지막 마술사라고 불렀다. 1만 년 전의 마법사들처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를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 우주 과학의 놀라운 성과도 뉴턴의 이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뉴턴을 '과학사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거목'으로 묘사했다. 17세기에 확립된 그의 이론은 아직도 개정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에 현대 과학과 철학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9부 조지 워싱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심지어, 미국의 1달러짜리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또 어떻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까?이번 바이오그래피에서는 당시 미국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조지 워싱턴의 정치가로서의 삶, 그리고, 미국인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남아있는지 살펴보는 기회를 가져본다.버지니아주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이상형이자 영웅이었던 이복형이 죽자 버지니아주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이어받고 본국이었던 영국에 맞서 토지문제를 놓고 크게 반발하게 된다. 워싱턴은 27세 때, 엄청난 부자이자 두 아이를 가진 미망인이었던 '마아더'와 결혼했는데, 이를 둘러싸고, 과연 사랑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의 의견도 분분하다. 이후, 버지니아의회 의원 자격으로 대륙회의에 참석한 후, 영국과의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는데 이 때부터, 식민지군을 격려하고 역경을 극복해 나가면서 많은 사람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된다.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미국의 독립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서 의장직을 맡게 되어 1789년 4월 30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당시, 57세였던 그는 60세 되던 해, 대통령에 재취임하여 다시 한 번, 역사에 길이 남을 미국의 영웅이 된다.오늘날에도, '조지 워싱턴'은 미국 역사를 가장 빛낸 인물이라고 할 만큼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미합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부 토마스 에디슨
 
1847년 오하이오 밀란에서 출생. 학교에서 저능아로 놀림을 당하던 토마스 에디슨을 어머니 낸시는 집에서 가르치기로 한다. 12살부터 철도에서 사탕과 신문을 팔던 토마스는 기차 실험실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귀를 맞은 뒤 청각장애를 앓는다. 15살에 전신술을 배워 미국과 캐나다에서 전신수로 일하던 에디슨은 1868년 전기투표기록기를 발명해 최초 특허를 받게 되고, 그 다음해 주식상장표시기를 발명한다. 이때 받은 기금으로 뉴저지에 실험실을 세우고, 1876년 멘로파크, 1887년 웨스트오렌지로 실험실을 옮긴다. 1877년 축음기, 1879년 백열전등, 1891년 영화촬영기, 영사기를 발명한다. 멘로파크 연구소와 웨스트오렌지 연구소는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11부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며, 저명한 과학자, 저술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 그는 1704년 미국 보스턴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명석함을 보였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 12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양초를 만들었다. 그러다 형의 인쇄소에서 ‘뉴잉글랜드 커런지’지의 발행을 도우면서 점차 인쇄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 책에도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됐다.
 
그는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기를 발견하고 피뢰침을 발명했다. 1752년에는 연을 이용한 실험으로 번개와 전기의 방전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전기유기체설’을 제창했다. 저서로서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것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미국 독립과정에서 식민의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의 활동과 프랑스를 상대로 펼친 외교가로서의 역할이었다.
 
1751년 펜실베이니아 식민의회의원으로 선출된 프랭클린은 75년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일어난 후 독립선언 기초위원으로 임명된다. 76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미국-프랑스 동맹을 성립시키고 원조를 얻는 데에 성공했으며, 83년엔 파리조약의 미국측 대표의 일원이 됐다. 87년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헌법회의에 참석해 각주의 이해를 조정하며 헌법제정에 힘쓴 그는 새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790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2부 그레이엄 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1847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멜빌은 화술교육가로 이름이 높았고,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는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아버지 대신 보스턴 농아학교에서 근무하던 벨은 음성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옆방 조수가 건드린 진동판에 신호가 온 것을 계기로 전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전기연구가인 라이벌 ‘엘리사 글레인’ 역시 같은 날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지만, 1시간 빨랐다는 이유로 특허는 벨에게로 돌아간다. 전화기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이는 수많은 그의 발명품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가 행한 뜻있는 일들은 그 밖에도 많다.
 
항해와 비행을 즐기던 그는 위기에 몰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를 재정적으로 구원하고 2대 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도 잊지 않았다. 청각, 시각, 언어 장애였던 헬렌 켈러에게 애니 설리번을 소개해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한 것도 벨이었다. 헬렌 켈러는 이후 자서전에 그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책을 헌사했다.

 
13부 구글의 창시자 페이지와 브린
 
‘Google’은 인터넷 검색엔진의 하나로 1998년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검색엔진이다. ‘Google’이라는 이름은 칼 세이건이 언급했던 ‘10의 100승’을 뜻하는 'googol'이란 단어에서 따왔다. 
 
그가 중점을 둔 분야는 컴퓨터 공학이었고, 이후 ‘레고 사‘에 입사해서 잉크젯 프린터를 만들어 히트를 치기도 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2002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의 ‘내일을 위한 글로벌 리더‘로 지명되었다. 래리는 현재 미시간대학 엔지니어링 학부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며, 2004년 이후로는 미국공학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기술담당인 공동창립자 겸 사장 ‘세르게이 브린’은 모스크바 출신으로, 수학 및 컴퓨터과학 학사 학위가 있다. 세르게이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래리 페이지를 만나 ‘Google’의 전신인 검색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4년 래리와 세르게이는 ABC ‘월드 뉴스 투나잇’에서 선정하는 ‘금주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래리는 "완벽한 검색 엔진이란 사용자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원하는 결과를 정확하게 제공하는 엔진"이라고 말한다. ‘Google’의 성장은 TV나 다른 광고가 아니라 서비스에 만족한 사용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검색문제 해결에만 주력하는 세계 최대의 연구 그룹을 보유한 ‘Google’은 자사의 강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강점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Google’의 맞춤법 검사 기능이나 ‘Google 툴바’와 같은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 수백 만 사용자가 빠르고 완벽하게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항상 기대를 능가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Google’에게 최고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14, 15부 대통령의 어머니들 1, 2
 
여기 미국의 대통령들을 만든 어머니들이 있다. 단아한 모습의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부터, 아들보다 더 달변가였던 카터 대통령의 어머니, 즐거운 생을 살려고 노력했던 클린턴 대통령의 어머니, 그리고 남편과 자식을 모두 대통령을 만든 조지 W. 부시의 어머니 등 여러 인물이 소개된다. 어려운 시대와 다양한 환경을 막론하고, 자식들을 당대 최고의 인재로 길러낸 이 어머니들의 능력은 사랑의 힘이 그 원천이었다. 먼저 포드 대통령의 어머니 도로시는, 의처증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학대하는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고자, 어린 아들 포드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냥 두었으면 폭군 같은 아버지 밑에서 비행청소년이 될 수도 있었을 미래의 대통령을 지켜준 것은 강한 그의 어머니였다.
 
카터 대통령의 어머니 릴리안은 그 어떤 대통령의 어머니보다 열정적이고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인 사람이다. 인종문제, 사회복지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였다. 인도 등 오지를 노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인 도로시는 주지사였던 남편을 비롯해서 자식과 손자들이 모두 냉혹한 정치세계에서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들에게 청렴과 친절을 잊지 말 것을 강조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아들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 또 둘째 아들인 젭 부시 주지사의 어머니인 바버라는 ‘훈련소 조교’로 불릴 만큼 자녀들을 철저하게 훈육시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귀가시간을 엄수하라.” 바버라는 이런 글이 쓰인 쪽지를 자녀들의 방에 붙여놓았다.
 
조지 부시 부자와 빌 클린턴,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등 역대 미국대통령들의 인터뷰와, 대통령들의 어린 시절 모습, 그리고 가족들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자리이다. 늘 뉴스에서만 접하던 딱딱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니라, 어머니 자랑을 하는 평범한 한 아들로서의 부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이다.
 

16부 모차르트
 
그는 역사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음악신동이다. 사치스럽고 음란하며 쾌락주의자였던 그의 영혼과 비전은 슬픔과 상실의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사랑 받아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천재일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인터뷰와 공연을 담았다. 특히 지휘자 주빈 메타,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조슈아 벨,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 소프라노 던 업쇼, 모차르트 장학생 로버트 마셜, 작가 메이너 솔로몬 등이 함께 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또한 음악가였다. 1756년 잘쯔부르크에서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곧 그의 천재성을 알아봤다. 아버지의 지도 아래 모차르트는 4살에 미뉴에트를 연주했고 5살에는 작곡을 시작했다. 아들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교황과 영국, 프랑스의 왕, 여왕들을 비롯, 유럽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초청해 연주를 시켰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커가면서 점점, 아들을 자신의 밑에 두려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와 부딪치게 된다. 모차르트는 마침내 자유를 찾아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그 대가는 가족간의 불화였다. 유럽 법정에서 아버지 몰래 다른 가족들과 만나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수많은 성공과 비엔나, 프라하에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비싼 저택과 도박, 사치스런 생활 방식으로 인해 그는 빚더미에 안고 말았다. 그의 음악에는 사랑, 분노, 따스함, 거만함 같은 놀랄 만큼 다양한 감정이 표출돼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장르에서 모차르트민큼 수많은 대작들을 작곡한 음악가는 없었다. 그는 오페라 "마술 피리",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를 작곡했다.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이지만 그는 교향곡과 세레나데, 춤곡, 피아노 협주곡 등 다양한 곡을 작곡했다. 모든 곡이 아름다웠으며 또한 거의 모든 곡이 불후의 명작이다. 하지만 그는 37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의 죽음은 음악사에서 가장 큰 비극으로 여겨졌으며 2백 년이 넘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경쟁자 살리에르에 의한 살인이었을까? 여기서는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들과 그의 신념 등을 조명해본다.
 
17, 18부 아이젠하워 1,2부
 

사교적인 한 인간으로서, 만군을 지휘한 장군으로서, 34대 미국대통령으로서,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으로서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캔자스 주 애빌린 시골 마을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사냥, 낚시, 트럼프카드, 미식축구를 즐기는 소년이었고,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한 후 청년장교 시절 조지 패튼과 탱크전을 연구했으며, 폭스 장군 밑에서 전략가 수업을 받았고, 맥아더 장군 밑에서 모시기 힘든 상사를 모시는 법을 배웠다. 합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군생활 수십 년을 미 국내와 파리, 필리핀, 파나마를 전전하며 영관급 장교로 지낸다.   

 

그러나 1941년 12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그는 군인으로서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린다. 루즈벨트 정부의 국방장관 조지 마셜에게 발탁되어, 그 후 불과 2년 동안에 4성 장군이 되어, 북아프리카 탈환작전, 시칠리아 탈환작전을 지휘했고, 결국은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에 이은 유럽전쟁을 지휘 조율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종전 후 한동안 컬럼비아대학교 총장, NATO 사령관을 지냈고, 1952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압승을 거두고 1953년 미국의 34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군인출신이지만 전쟁이란 가장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을 때만 해야 하는 최후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자마자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한국인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6.25세대 한국인들에게는 친밀감을 주는 미국 대통령이다.

 

  두 차례의 임기동안 미소 냉전의 완화에 노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 없는 대통령“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그는 성격자체가 떠벌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두 번째 임기에 취임했을 때, 그는 대륙횡단 도로망 계획을 추진하여 총연장 6,400km에 달하는 도로건설을 추진했다.

  그는 미소대결에서 물리력의 충돌을 피하려고 여러 유화책을 썼지만 그의 임기 중 미국은 국력에 있어서 항상 소련을 압도했다. 그런데도, 그의 첫 임기 중, 조 매카시의 ‘매카시 선풍’이 불어, 대통령마저도 공산주의에 너무 온건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매카시의 광적인 정치공세에 불과했다.

 

  아이젠하워는 인종분규와 민권신장을 등한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2등 시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으며, 리틀록의 학교들이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인종차별을 계속하자, 군대를 동원해 이를 분쇄했고, 군대의 인종차별도 그의 임기 중에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    그는 군인이라 항상 “나라의 부름에 응해 봉사하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부인에게도, 우선은 “나라“이고 그 다음은 “당신“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었다. 그는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항상 외지에 나가 근무를 했지만, 청년 장교시절부터 가정적인 인물이었다. 결혼 후 40여 년이 지나서야 공직을 떠나 게티즈버그에 가정다운 가정을 이루고 살았지만 말이다.

 

  그는 2차대전의 영웅으로, 냉전기에 미국을 이끈 대통령으로, 모범적인 가장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인물이며, 자기도 한 명의 평범한 미국시민임을 강조했던 겸허한 사람이었고,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국가가 자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19부 콘돌리자 라이스
 

현재 미국의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으로 손꼽히는 콘돌리자 라이스는 성공한 흑인, 특히 흑인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교육자인 부모의 세심한 배려 속에 콘돌리자 라이스는 어릴 적부터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영재교육을 받았다. 피아노와 아이스 스케이팅에 소질과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초등학교 때 월반을 거듭해야 할 만큼 뛰어난 학업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13살 때 아버지가 덴버 대학의 부학장이 되면서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사해 사립여학교에 들어갔다. 그녀의 인생의 전기가 된 것은 덴버 대학 1학년 때 조세프 코벨 교수의 소련정치론을 수강한 것이다. 체코 외교관 출신인 코벨 교수의 강의는 라이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녀는 이때부터 공산권 연구를 자신의 평생 학문분야로 삼았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6살에 조교수가 되었다. 그녀에게 또 한번 인생의 전기가 온 것은 게리 하트 상원의원의 눈에 띄어 국제정치에 대한 자문을 해 주면서 부터다.

 

이후, 워싱턴 정가의 정책 브레인들과 교류를 갖던 그녀는 지난 2000년 부시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으로 일약 발탁되었다. 그 후, 아프간 사태와 이라크 전, 9.11 사태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미 정부의 대응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콘돌리자 라이스의 판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는 그녀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적이고, 예술적 소질이 풍부하고,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 미모의 흑인여성이 언제 또 하나의 인생의 전기가 될 결혼을 하게 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20,21부 오프라 윈프리 1,2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여성이라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의 성장 과정은 매우 불행했다. 18살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그녀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는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9살이 되던 해에는 10대였던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14살이 되기 전엔 친삼촌에게도 같은 일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은 어린 오프라에게 커다란 수치심과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또 14살의 몸으로 사생아를 낳았으나 2주만에 아이를 잃기도 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오직 책뿐이었다.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비결은 바로 이 독서습관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불우했던 생활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의 방대한 독서는 이후 그녀의 인생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뉴스 앵커를 희망했지만, 유색 인종이었던 그녀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22세 때 볼티모어 TV방송국 메인뉴스 앵커가 되지만, 그녀의 진행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담당자에 의해 아침 토크쇼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편안하고 거침없는 진행으로 아침쇼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몇몇 지역에서는 당시 토크쇼의 제왕이라 불리던 필 도나휴의 쇼를 능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에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맡기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 전미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20년 가까이 토크쇼의 여왕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그녀는 85년에 출연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또 흑인 최초로 보그 지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엄청난 체중감량으로 많은 이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면에서 주목받은 그녀를 오늘날의 성공으로 이끈 것은 단연 '오프라 윈프리 쇼'였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시사문제를 적절히 섞어 일반 시청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그녀의 진행방식이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까지도 거침없는 털어놓는 솔직함과 편안한 진행은 틀에 박힌 다른 토크쇼와는 분명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갑부, 시사주간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의 인물'중 한 사람, '세계 10대 여성', 토크쇼의 여왕, 미국 최고의 커리어우먼, 베스트 셀러 작가 등 오프라 윈프리에게 붙는 수식어는 실로 다양하다. 97년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3위에 뽑히기도 한 그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성차별과 인종의 벽을 뛰어넘은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신화는 불우했던 그녀의 성장과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더욱 빛을 발한다. 그것은 그녀가 토크쇼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몸소 실천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운명을 개척했기에 오늘날의 오프라 윈프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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