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순암 안정복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9.09 14:45

                                                                                    순암 안정복의 생애와 업적

    



일러스트    

   순암 안정복(, 1712~1791)은 숙종 말기에 태어나서 정조 말기에 세상을 떠난 실학자이다. 본관은 광주()이고 호는 순암()이며, 자는 백순()이다. 안정복의 집안인 광주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안방걸()로, 광주는 태조에게 받은 사패지(: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다.

   안정복이 주로 살았던 경기도 광주는 지금의 행정구역과 달리 서울 강남, 강동, 하남시, 남양주시 등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광주부는 실학의 종장()인 성호 이익(, 1681~1763)의 영향을 받은 순암 안정복과 다산 정약용(, 1762~1836) 등 재야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경세치용()의 근기실학이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1.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 

   조선 초기에 좌참찬을 지낸 안성(, 1344~1421)이 안정복의 12대조이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름)하여 공신에 봉해 진 안황(, ?~1593)이 그의 6대조이다. 이후로 현달한 인물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 안정복의 고조 안시성()이 현감에 오른 적이 있고, 증조 안신행()은 그보다도 못한 빙고() 별검 자리에 나갔으며, 그나마 조부 안서우(, 1664~1735)가 비교적 현달하여 태안군수를 거쳐 울산부사(종3품)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부 안서우는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세상이 되자 당류의 배척을 받아 탐관오리죄로 울산부사에서 파직되는 비운을 만났다. 안서우는 파직 후 서울을 떠나 전라도 무주에 내려가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들 안극()과 손자 안정복 등 온 가족이 함께 무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조부의 몰락은 안정복과 그의 부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부친인 안극은 일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의 비운을 목도한 후 38세 이르기까지 과거 시험은 물론이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일체 포기하였다. 조부의 파직이 가져다 준 충격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은 안정복의 학문 활동에도 영향을 주어, 출세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좋아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인 유학 경전도 공부했지만, 그는 음양ㆍ성력()ㆍ의약ㆍ점복, 손자병법, 불교ㆍ노자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15~16세에는 이미 통달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세간에 ‘방술가()’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학문적 경향 때문이었다.

                                                                 2. 고향에 돌아온 후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던 안극과 안정복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안서우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736년, 안정복의 나이 25세였다. 광주 덕곡리에 돌아온 안정복은 ‘순암’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순암이라고 불리는 집은 규모가 8칸이 되는 ‘엄()’자형의 가옥이었다. 또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라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이택재(麗澤齋) 전경. 이택재는 안정복이 지은 서재 건물로, 학문 연마 및 제자들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과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방술학보다는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어 [성리대전]과 [심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수기치인()’, 즉 인간의 윤리 도덕과 사회참여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나 그가 왜 광주로 환향한 것을 계기로 학문적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광주 환향 후, 안정복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광주로 온지 1년 후인 26세에 <치통ㆍ도통이도()>를 시작으로 27세에는 뒷날 [임관정요()]의 모체가 되는 <치현보()>와 동약()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29세에는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 <정전설()>에 대해 썼고, 30세에는 주자의 글을 모방한 <내범()>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광주 지역 근처에 사는 실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33세에 반계 유형원(, 1622~1673)의 증손으로부터 [반계수록()]을 입수해서 읽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 <반계연보>를 짓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현실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정복은 35세에 자신의 학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안산 첨성촌에 살고 있는 성호() 이익(,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안정복의 대표 저술인 [동사강목()]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익과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는 안정복의 학문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 아닌 30대 중반에 어느 정도 학문과 사상 체계를 이룬 뒤였기 때문에 이익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3. 관직 생활과 후진 양성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 안정복은 문음(: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만령전참봉(殿, 종9품)을 시작으로 의영고참사(, 종8품), 정릉직장(), 귀후서별제(, 종6품)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사헌부감찰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이후 61세까지 18년간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임관정요](1757. 46세), [동사강목](1759, 48세), [열조통기](1767, 56세) 등 그의 대표 저술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저술은 아니지만 [이자수어](1753, 42세), [성호사설유편](1762, 51세)과 같은 편집글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저작물들이다.

    40~50대를 학문과 저술 활동으로 보낸 안정복은 61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다. 예순이 넘은 그에게 동궁(훗날의 정조)을 가르치는 일이 맡겨졌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서는 고령의 나이인 그에게 목천현감이라는 수령 자리가 주어졌다. 1776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 살이었다.

    “풍속은 퇴폐하고 아전들이 교활하나, 이를 개혁하여 백성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녹봉이 비록 박하나 끼니 걱정이 없고 밥상에는 반드시 고기가 오르니, 어찌 집에 있을 때의 모습에 비하겠는가.”     [순암선생문집] 13권, 상헌수필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주고, 민폐를 해소하기 위해 온 정열을 기울인지 3년. 백성들은 나무를 깎아 송덕비를 세우고 그의 치정()을 기렸다. 안정복은 72세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돈녕부 주부(정6품)ㆍ의빈부 도사(종5품)ㆍ세자익위사 익찬(정6품) 등을 역임했다. 비록 한직이지만, 이 또한 고령인 안정복을 배려한 정조의 처사였다.

                                                                      4. 천주교를 반대한 보수적인 실학자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안정복은 학자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는데,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신자인 권철신(, 1736~1801)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후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책인 [천학고()]나 [천학문답()]이 간행된 것도 1785년, 안정복의 나이 74세 때이다.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는데,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안정복은 죽기 직전인 79세에 가선대부(종2품)에 가자(: 관원의 품계가 올라감)되고, 동지중추부사로서 광성군()에 피봉되었으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인 순조 원년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 자헌대부(정2품) 의정부좌참찬겸지의금부사ㆍ오위도총부총관이라는 벼슬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익의 제자로서 천주교를 믿었던 이가환ㆍ권철신ㆍ정약종 등 남인 학자들은 사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중 권철신은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의 형이며, 권일신도 장인인 안정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하였다.

                                                              5. [동사강목]은 어떤 책인가?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에 위치한 안정복 묘소.    


   안정복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대표작은 [동사강목]이다. 평소 자국의 역사가 제대로 서술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절치부심하여 마흔여덟 살에 이 책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조리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한다.

   [동사강목]의 핵심은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단군ㆍ기자ㆍ삼한을 정통의 줄기로 잡고 한족()이 침입하여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러면 안정복은 왜 [동사강목]을 편찬했을까?

   내가 여러 역사책을 읽어본 후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폭넓게 다루면서 중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역사 자료를 가져와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 ……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     [동사강목] 서문 중에서

   안정복은 중국 사서 중에서도 주자가 쓴 [자치통감강목()]을 최고의 사서로 인정한 인물이다. [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주자의 강목체 서술을 표준으로 하여 서술된 역사서이다. 강목체는 역사를 기록할 때 ‘강()’과 ‘목()’으로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강은 기사의 큰 줄거리를 기록한 것이고, 목은 강의 하위 항목으로, 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강목체를 기본으로 하는 역사서는 보통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른 정통의 구별과 포폄(: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을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동사강목]이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데는 역사의 정통을 바로 세운 것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이 그 이전의 사서에 비해 광범위하고 철저했다는 데 있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쓸 때 [동국통감()]을 기본 자료로 삼으면서 각 시대의 역사책과 문집들을 널리 참고하였고, 나아가 중국인이 쓴 기록과 [일본서기]에서도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당시로서는 자료 수집 면에서도 가장 충실한 사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한계점은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책이라는 평가에는 재론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 1893~1950)나 단재 신채호(, 1880~1936) 등이 가졌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안정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동사강목]에 서술되어 있는 삼한정통론은 일찍이 스승인 이익이 주창한 바 있었고, 안정복은 그 계승자로서 이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한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단군ㆍ기자ㆍ위만을 합하여 삼조선()라고 한 [동국통감]의 역사 체계를 비판하고,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므로 삭제한다고 기술하였다. 안정복의 삼한정통론으로 우리 역사는 1천여 년이 끌어올려졌고, 독자적 역사관이 제시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을지문덕과 강감찬 등 외래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국방 문제나 백성들을 위한 개혁안 등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서술하였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안정복 자신이 처해 있는 조선 사회의 현실 모순을 상징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1. 정성희/장선환, "자국의 역사를 체계화한 보수주의 실학자",  인물한국사, 20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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