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인보다 한국 산을 더 사랑한 데이비드 메이슨의 산신 이야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19.03.16 04:42

                                                         한국인보다 한국 산을 더 사랑한 데이비드 메이슨의 산신 이야기

   데이비드 메이슨(David Mason)은 한국에서 18년간 산신에 관한 공부를 해왔다. 1997년 연세대에서 <산신에 관한 연구>로 한국학 석사를 받았다. 메이슨이 1982년도 한국의 사찰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절 한쪽에 모셔져있는 한국의 산신은 그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 후 한국의 수많은 절을 찾아다니며 한국문화를 연구하였는데, 산신은 그 기초적 대상이 되었다. 1988년도 서울 올림픽 무렵부터, 한국인 중 특별히 산신을 깊이 연구한 고 조자용 박사의 제자가 되어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영문판으로 SPIRIT OF THE MOUNTAINS를 출간하였고, 곧 한국어판을 낼 예정이다. 메이슨은 성천아카데미 현대생활문화강좌에서 한국산신에 관한 견해와 연구를 소개하였는데, 아래는 임재춘 객원기자가 간추린 내용이다.
                                                                                      1. 한국의 산신문화
   한국에서 언제나 산은 숭배 받는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인 한국의 산신은 샤머니즘, 단군사상, 풍수지리 등 모든 것이 복합된 한국의 가장 전통적이고 원형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산신 그림은 300년 전부터 그려졌으며, 중국식 도교 복장에 단군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국토는 75%가 산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형이며 이것은 한국문화의 자연적인 환경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산신 숭배는 한국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로 보인다.
   고대 비석의 비문이나 기록에는 산신에게 바쳐진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후대에 불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고유의 산신 숭배 등 토속신앙에 의해 저항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의상대사는 부석사에 화엄도량을 지을 때, 부석으로 신통력을 보여 주어 먼저 그 터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절에서도 산신의 존재를 인정하여 전통적인 산신문화를 흡수하였으며, 사찰 한쪽 절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산신각을 지어 숭배하도록 허용하였다. 일반 신도들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모든 산은 혼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살거나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그 혼을 받고 그들의 인간성이 깊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믿었다. 산의 ‘혼을 받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을 신선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과 그들 본래의 인간적인‘자연’으로 돌아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큰 자연과의 만남을 연다. 이러한 개인의 영향과 더불어 한국역사의 긴 과정을 통해, 산신은 각 마을의 공동체적인 수호신이 되었고, 나아가 은연중에 한국이란 나라 전체의 수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지난 세기의 가혹한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넓고 다양한 배경에서 산신을 존경하거나, 적어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산신은 그가 남용되거나 무시되었을 때는 해를 끼친다고 알려졌지만, 적절히 대우받을 때는 매우 인자하다고 알려졌다. 지금도 각 사찰의 많은 신도들에게는 산신에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한국신앙에서 산신은 지구나 자연의 혼 중에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최고로 받들어졌고, 모든 의식에서 높은 경의로 대우받았다.
    산신의 인격화 한국인들은 산이 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산이 자신의 의지로 사람의 형태나 호랑이로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일찍부터 그것을 인격화했다. 산신은 무당 30 진리의 벗이 되어 데이비드 메이슨(David Mason) 현대 생활문화 강좌의 몸을 빌리거나 혹은 특별한 수행을 닦은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냈다. 몽환이나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꿈과 환상을 통해 현신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록신화에서 산신은 현명한 노인이거나 아름다운 여성으로 나타나지만, 이론상으로는 어떤 형태의 인간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삼국유사』에는 그러한 기록이 꽤 보인다. 하지만 산신이 청년이나 아이로 표현된 경우는 없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나타난다.  수백 년 전에 선운산에 있는 선운사에서는 두 명의 형제 수도승이 그 절과 그 산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쌍둥이 산신이 되겠다고 죽기 전에 선언했다. 그들이 자연적으로 동시에 죽고 화장된 후에, 지역 주민의 꿈에 나타나, 그들이 이제 선운산신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지역 주민과 사찰에 의해 그렇게 숭배되어 왔다. 지금 그들은 선운사와 그곳의 모든 암자에 있는 산신탱화에 불교의 수도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채로, 그들 둘 옆의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묘사되어 있다. 보통의 산신 탱화도 각각의 암자에 있지만 그들은 기존의 선운산신을 대체하거나 경쟁심이나 갈등, 혹은 계급적인 차등을 느끼지 않고 함께 어울리며 오히려 산신을 높여준다. 유사하게 석탈해 이사금(A.D. 50~80, 신라의 전설적인 네 번째 왕)은 그의 매장 후에 경주시의 동쪽 봉우리의 토함산신이 되었다.
    영적인 존재로 환생하여 나라나 지역을 지킨다는 생각은 한국의 민간전승에서는 흔하다. 가장 유명한 예는 한국의 첫 번째 왕인 ‘단군’일 것이다. 그는 그의 왕국이 정복되었을 때 산신이 되었다. 산신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보호를 해주는 주된 존재이다. 다산을 주며, 좋은 운을 보증하고, 유용한 충고를 주는, 자연의 두려운 힘과 조화로운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인간을 위한 긍정적인 이익을 상징한다. 산신은 때때로 사당이나 의식에서의 제물 형태로 선물이나 공물을 요구하는 것 같이 보이고, 산신을 숭배하지 않는 자나 자신의 금기를 어기는 자에게는 질병, 재해, 부상, 파산이나 죽음과 같은 불운을 야기하는 것에서 볼 때 복수심도 강해 보인다. 그러나 조사를 해보면, 충분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방식으로 산신이 행동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산신은 자신에게 적절히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주기보다는, 단지 호의적으로 보호하는 운을 박탈한다.
    산신은 전통적인 양반의 이미지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의무에 헌신하지만 거북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고, 자신의 지위나 중요함에 대해 의식하는 이미지로 보인다. 때로 요구하고 독선적인 태도를 가진 산신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표시로 적절한 공물이 바쳐져야만 했다. 각각의 산신은 특정한 산의 지배자이거나,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의 자연신이다. 그래서 그것은 계곡의 문명화된 땅을 지배하는 귀족적인 존재였다. 더 큰 시각에서 보면 한국 야생의, 대지신의 집합체이다. 그들은 동시에 하나이면서 여럿이며 개인이면서 집합체다. ‘한국의 첫 번째 왕인 단군은 산신의 집합적 관념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라는 관점까지 있다.
                                                                                  2. 산신의 초상과 상징
    산신은 한국의 역사가 내려오는 동안 수백 만 번 묘사되어 왔다. 돌과 나무에 조각되고 회반죽과 시멘트에 의해 주조되며 종이나 비단에 그려지거나 벽에 직접 그려지거나 하였다. 가장 소박한 방법은 큰 바위와 그 부근에 세워진 산신단이나 성황당에 표현되어 있다. 간단한 제단이 바위 밑이나 우묵한 곳에, 두세 개의 타고 있는 흰 초와 신선하고 깨끗한 물 한 사발이 함께 받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위의 기슭 외에도 돌무덤 옆이나 사찰 암자 옆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산꼭대기로 가는 길옆에는 숲의 야생동물을 위해 그 지역의 산신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남은 제사음식이라는 제물이 남겨지기도 한다.
    성황당은 종종 돌무덤의 형태를 띤다. 세 개나 그 이상의돌이 자유롭게 서 있는 수직의 탑을 구성하거나 늙은 신성한 나무에 기대어 있거나 수백 개의 돌들이 큰 덩어리로 모인, 그러한 형태로 한국 전역에서 발견된다. 큰길이나 오솔길, 사찰 건물 옆이나 산꼭대기 위에, 행인은 종종 그 탑의 꼭대기에 한 개의 돌을 더 얹어놓으려고 애쓰거나 행운을 빌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의 오랜 산신 전설을 아는 일부 사람들이 그 혼에 대한 존경에서 절을 할지도 모른다. 이 돌무덤들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뜻을 가질 것이다. 하늘을 향해 도달하고 있는 탑처럼 보이거나, 하늘의 기를 땅으로 이끌기 위해, 혹은 자연의 혼에게 행운을 비는 호소로, 혹은 미숙한 탑처럼 또는 신화적인 존재처럼 그들은 직접적이든 희미하게든 산신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있다.
    산신탱화는 한국 불교 사찰의 사당에서 발견되며, 더 크고 복잡한 그림은 가장 정성 들여 만들어 졌고 흥미로우며 개성이 부여되어 있다. 현존하는 수천 개의 그림에서 어떤 것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다.
    회화의 기원 정확히 언제 이 그림들이 만들어지고 쓰여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존하는 최고의 불교 사찰화가인 만봉 진리의 벗이 되어 진리의 벗이 되어 스님은, 도교가 들어왔던 1400년 무렵에 형식을 갖춘 산신 초상화가 한국 불교 사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러나 중국의 도교는 서기 400년경에 고구려 왕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의 의식 중에는 신성한 산에 대한 제사가 포함되며, 불교 회화가 매우 발전된 예술이었을 때인 고려 왕조(918-1392)에는 도교와 불교가 혼합되어 큰제사가 당당히 행해졌다. 예전에 산에 대한 숭배는 공식적으로 또 그 지역의 샤먼에 의해 실행되었지만, 산신의 그림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삼국시대에  수입된 중국의 불교와 도교로부터 그들 자신의 들에 위한 영원한 사당을 빌려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당과 왕족들이 지원해 준 도교의식에서는, 아마도 신성한 나라를 보호해주는 산들은 인격화된 산신보다는 유교식의 조상신에 의해 표현되었을 것이다. 어떠한 산신의 사당 건물도 17세기보다 더 일찍 건립된 것 같지는 않다고 알려져 있다. 몇몇의 무덤그림을 제외하고는 17세기보다 더 이전에는 샤머니즘의 그림은 없다.
     가장 오래된  산신그림은 1650년대의 것으로 보이는 인왕산 국사당에 있는 작은 것이다. 만신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00년 정도 되었으며, 불교 사당에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230년쯤 되었다. 산신의 인격화된 초상은 17세기 전부터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3. 산신탱화에 나타난 이미지
    전통적으로 산신탱화의 개인적 요소는 만신(한국의 샤먼)이 의식의 몽환적 경지에서 얻은 산신의 모습에 의거하여 그려졌다. 그러한 관습은 오늘날 어느 산의 어느 사당에도 놓여질 수 있는 좀 더 일반적인 그림이 보편화되면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이 독창성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술적 수준은 높아지고 있으며, 사용된 도상의 주제는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혼합된 한국 샤머니즘, 도교, 유교, 불교의 상징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산신은 거의 항상 머리와 수염이 하얀, 늙었지만 여전히 건강하며 힘이 세고 권위 있는, 앉아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의 얼굴 생김새는 인정 많고 친절하지만 여전히 이상적인 가족의 가장처럼 엄격하고 위엄이 있다. 그의 의복과 머리 장식 그리고 보통 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사물은 건강한 장수, 부, 공적인 지위나 고귀한 신분, 학문적이거나 지적인 경지 혹은 영적인 힘을 시사한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주요한 인물은 북극성신이나 칠성신, 지신, 노자(도교의 전설적인 중국 창시자), 한국의 신화적인 첫 번째 왕 단군, 한국의 최고 하늘 신(천신, 제석, 한울님, 하느님, 혹은 환인이라 불리는) 등이 있다. 그들의 초상은대개 서로 유사하게 보인다.
    산신은 평평한 바위에 앉아 있거나, 넓은 전망을 가진 높은 산에서 명상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보통 적어도 한 그루의 옹이 투성이의 소나무가 산신 옆에 있다. 이것은 장수를 의미한다. 손에는 꼬불꼬불한 지팡이를 들고 있다. 나뭇잎 모양의 부채, 산신부채를 들고 있다. 또 불로초의 모습이 보인다. 인삼의 모습도 때로는 보이고, 손으로는 무드라(mudra, 손가락을 둥글게 만든 모양)를 하고 염주를 들고 있기도 한다. 그의 옆에는 한국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는 큰 집고양이처럼 길들여진 모습으로 친근감 있게 그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호랑이를 산의 지배자로, 두렵고 무섭지만 또한 위엄을 갖추고 있는 도덕주의자라고 본다. 산신은 자신의 의지로 사람이나 호랑이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좀 더 자주, 그림에서의 호랑이와 숲에 있는 진짜 호랑이는 일종의 산신의 조수인 것처럼 보인다. 산신의 의지를 전하는 사자 혹은 더 고귀한 역할은 산신의 탈것으로의 역할이다. 또 천도복숭아를 가지고 있거나 옆에 서 있는 동자에게 복숭아를 건네기도 한다. 복숭아는 장수나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옆에는 물(폭포), 구름, 해, 학, 사슴, 거북이, 소나무, 대나무 등 십장생의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산신에 대한 제례 산신에 대한 제사는 고려, 조선조까지 지속되었다. 공식적으로 5곳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지리산의 남악당, 묘향산의 북악당, 치악산의 동악당, 계룡산의 중악당, 삼각산의 서악당 등 다섯 군데가 있다. 지진리의 벗이 되어 33 리산의 남악당과 치악산의 동악당은 최근에 다시 건축되었으며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당에서는 지금도 매년 세 번째 보름날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산신신앙에 대한 새로운 기대 20년 전까지만 해도 산신이 많이 잊혀졌는데, 88년 올림픽이후 산신의 존재가 점점 부각되고 있다. 800여 사찰을 여행해보니 산신각이 점점 커지고, 산신상과 그림이 점점 커지고 좋아지고 있으며, 구석에서 중앙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이고 있다. 40여 년 전 새마을운동 당시 쓰레기통에 버려진 산신화가 인사동의 골동품상에서는 10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건축한지 2년 된 지리산 천황봉 법계사 성모 할매 산신상은 4m로 거대하며 한글과 영문으로 국모 산신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산신신앙은 한국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 진화 발전될 것이다.
    첫째, 한국에는 많은 종교가 들어와 있지만, 산신 신앙은 한국문화의 상징으로 각 종교를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산신은 한국을 상징하는 독특하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서 관광 상품화되기에도 적합하다.
    둘째, 자연보호, 환경운동의 상징이 될 수 있으며, 산신제를 현대화해야 한다. 모든 자연사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생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북한의 단군 숭배사상은 산신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한국 무당이 금강산에 가서 산신제를 지내도록 북한이 허용한 것이 중요하다. 남북이 통일될 때 북한은 기독교나 불교 등은 받아들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산신문화는 전 한국인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민속문화가 될 것이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다.
                                                                       4. 산신각이 남아있는 서울의 주요 유적
   1) 천축사 : 도봉산 선인봉 남쪽 위치. 신라 문무왕 1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경내에 부처님의 고행을 본 받아 수행하는 참선도장인 무문관이 있음.
   2) 망월사 : 신라 선덕여왕 8년에 여왕의 명으로 창건. 고려시대 해거 국사의 부도, 범종, 금강 다라니판, 괘불 등 귀중품이 있는 도봉산의 사찰.
   3) 국사당 :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수호사당으로 남산에 세운 사당을 1925년 일본인들이 현재의 인왕산으로 옮긴 것. 단군왕검, 천산수 삼신, 태조, 무악대사를 위시한 제사를 모시는 곳.
   4) 사직단 : 인왕산 남동 기슭 사직공원에 있음. 나라의 국토 신을 모시는 사단(사단과 오곡신을 모시는 직단(정문은 보물 제 177호로 지정. 공원 안 북쪽에 단군 성전이 있고 뒤쪽으로 궁술연마장인 황학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5호)이 있음.
   5) 도선사 : 북한산에 있음. 신라말엽 도승인 도선 국사가 창건. 석불 전에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진 큰 바위가 있음.
   6) 화계사 : 조선 중종 17년에 신월 선사가 창건.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음. 조선 왕조 때 왕가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궁궐’로 불리기도 했음.
                                                                                        <참고문헌>
   1.  데이비드 메이슨(대학교수) 저 / 신동욱 역,  산신(한국의 산신과 산악 숭배의 전통) ,  한림출판사, 2017.11.20.
   2.  데이비드 메이슨, <산신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한국학 석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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