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민족음악가 윤이상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1.18 19:17

                                                                             민족음악가 윤이상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민족음악가 윤이상(尹伊桑, 1017-1995)은  1917년 9월 17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통영에서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작곡을 비롯하여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고 잠시 귀국한 후, 다시 1939에 일본에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1943년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한 이유로 감금을 당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1949년 「고풍의상」·「달무리」·「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숙명여대·덕성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한 후, 1959년 동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네델란드의 빌토벤과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독일에 체류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에 독일의 도나우싱엔 현대음악제에서 대편성 관현악곡 「예악」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작곡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65년에 「현악 4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에 연유되어 고초를 겪었다. 윤이상 선생은 1967년 6월 베를린에서 부인 이수자 여사와 함께 서울로 납치되었다. 제1심에서 종신형, 제2심에서 15년형, 제3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부인은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윤이상 선생은  2년간 복역을 하고 1969년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동베를린 사건은 윤이상선생의 삶과 예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동베를린 사건 이전에 윤이상은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인간, 동양적 정신에 내재하는 심미적인 작품을 써서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을 보여주었다. 동베를린 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 문제·분단 문제를 보다 구조적이고 온몸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분단으로 억압받는 민족과 민중, 통일의 문제, 폭력으로 고통받는 인류, 세계 평화의 문제가 나의 삶, 나의 예술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윤이상 선생은 감옥에서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나비의 꿈>과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 강서고분의 사신도에서 영감을 얻은 ‘영상’(이마주)을 작곡했다. 그리고 윤이상 선생은 옥고를 치르며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고 위안을 얻었으며,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를 찾아나섰다
   동베를린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독일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했고, 지식인·예술가들이 “윤이상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꿈>이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빈에서는 연주회가 끝나고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윤이상 석방’하라면서 횃불행진까지 했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203명이나 되는 유학생·예술가들이 수사받았지만 간첩죄로 인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조사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불법연행과 가혹행위를 한 사실을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동베를린 사건은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통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윤이상 선생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Hanover Hochschule ful Musik)에서 작곡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1972년에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85년에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1970년에 킬 문화상과 1987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다.
   윤이상 선생은 1981년에 5·18 광주항쟁의 그 비극을 음악으로 만들어  ‘화염 속의 천사’를 작사하고 작곡했다.
   윤이상 선생은 1987년 9월 26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남북음악가들이 함께 하는 민족음악축전을 제안했다. 남과 북 음악가들이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 전쟁터에서, 음악으로 평화와 통일을 노래하는 경이로은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의 DMZ 음악제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 문제는 그만큼 어렵다는 걸 실증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켰으며, 사망 전까지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유동의 꿈」·「나비의 미망인」·「요정의 사랑」·「심청」 등 네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바라」·「무악」·「예악」·「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등 40여 편의 실내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의 교성곡, 동요에서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1백 50여 편을 남겼다.
   1977년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자서전 『상처받은 용』이 독일과 서울 그리고 평양에서 각각 출판 되었다.
   윤이상 선생은 일평생 조국 대한민국을 노래하다가 1995년 11월 13일 타국 땅 베를린에서 서거했다.
   다섯 개의 교향곡 등 수많은 문제작을 남긴 윤이상 선생의 삶은 고단했다. 그러나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독일 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비롯해 세계의 권위 있는 상들이 민족과 조국을 사랑한 그에게 수여되었다.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여, 서양 현대 음악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에 주력을 하였으며,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유이상의 음악은 자기 조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연주되지도, 연구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요즈음 출판사 한길사 김언호 대표에 의해 윤이상의 생애와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어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김언호 대표는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윤이상  선생 자택과 윤이상선생이 재직했던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해 윤이상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해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의 <윤이상의 음악세계>을 발간했다. 634쪽이나 되는 이 책은 윤이상의 음악세계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으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8년 3월 30일, 윤이상 선생은 49년 만에 유골로 고향에 돌아와서, 그 고향 땅에 묻혔다. 고향의 드넓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통영음악당 앞마당이다. 그 음악당에서 연주되는 자신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윤이상 음악은 이제 조국에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주 연주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앞으로 정치적 그늘로부터 벗어나 그의 음악을 더 사랑할 것이다.
                                                                          <참고문헌>
   1. 김용환,『윤이상 연구』, 한국예술연구소, 1995.
   2. 한국음악협회,『한국음악총람』, 1991.
   3. 최성만·홍은미,『윤이상의 음악세계, 한길사, 1991.
   4. 김언호, "온 생애에 걸쳐 민족혼을 노래...예술로 보여준 최고의 정치", 경향신문, 2020.1.15일자.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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