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무용의 세계화에 앞장선 고 강선영 선생의 명복을 빌며 글쓴이 localhi 날짜 2016.01.22 20:06
                           한국무용의 세계화에 앞장선 고 강선영 선생의 명복을 빌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辛相龜

    고 명가(明嘉) 강선영(姜善泳)은 본명이 강춘자(姜春子)로 1925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국립무용단 단장,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14대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전통무용인들의 권익을 높여준 한국의 대표적인 무용가였다. 그는 근대 전통춤의 거장 한성준((韓成俊, 1875-1941) 선생의 제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2013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명예보유자로 지정되었는데, 지난해 8월 별세한 이매방(李梅芳, 1927~2015)과 함께 해방 후 전통춤의 마지막 1세대였다.
   1963년 서라벌 예술대학 무용과 강사를 시작으로 한양대, 세종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중앙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도 힘써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88년 12월 1일 중요 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같은 해 개인재산을 털어 고향인 안성에 태평무전수관을 개관, 전통문화 전승과 춤꿈 발굴, 양성에 힘썼다. 태평무보존회를 통해 키운 이수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
   고인은 "태평무는 제가 지난 반세기 이상 무용과 함께 살아오면서 우리 전통춤의 발굴과 올바른 전승을 위해 무대 위에서 가슴과 혼으로 땀 흘리며 전진해 온 결정"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또 "젊은 시절에는 우리 춤을 해외에 알리는 홍보사절로서 또 예총 회장과 국회의원을 지내면서도 우리의 전통 예술의 계승을 위해 노력했기에 많은 이수자들과 전수생들이 중견무용인이 돼 각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13세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성준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하도 무서워 한성준 선생을 보기만 해도 손발이 떨렸다.  그렇지만 15세에 한성준 고전음악연구소에 정식으로 들어가 무용 공부를 시작했다. 한성준 선생은 스스로 성품을 다스리지 않으려면 춤추지 말라고 했다. 그 당시 백조부 강경수가 예인을 뽑아 궁중에 들여보내는 궁중의전실 재인담당관이었는데, 이 때문에 스승 한성준을 ‘선생님’ 대신 ‘할아버지’라 부르며 춤을 배웠다. 태평무를 비롯해 한량무, 승무 등 스승이 만든 한국 전통춤의 백미들을 배워 전승한 인물이다.
  '태평무'는 왕과 왕비가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춤을 재현한 것으로, 한성준 선생이 왕십리 당굿에 독특한 무속장단을 바탕으로 창안해 손녀 한영숙과 제자 강선영에게 가르쳤다. 강선영 선생에 의해 전승돼 중요 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됐다. 우아한 동작과 박력있는 춤사위가 어우러졌으며 '정신과 발이 만나 노는 춤'이라고 할만큼 발디딤의 기교가 백미다.  경쾌하고 절도 있어 한국 민속춤의 정중동의 흥과 멋을 지니고 있지만,  절도있게 발을 꺽다 보니 걷지못할 만큼 발목이 욱신거린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한 선생이 만들고 강 선생에 의해 내려온 '한량무'도 서울시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성기숙(50세) 교수는 “태평무는 왕과 왕비가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춤을 재현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한성준의 문화 독립투사적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며 “이 춤이 손녀 한영숙(1920-1989)과 제자 강선영으로 전승됐다”고 설명했다. 한성준 생존 당시 왕 역할로 주로 췄던 한영숙의 춤이 정갈하고 단아했다면, 왕비 역이었던 강선영의 춤은 역동적이고 호방하다는 평을 받았다. 한영숙은 1969년 승무로 개인 무형문화재에, 강선영은 1988년 태평무(왕비 독무)로 무형문화재에 지정됐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할아버지(한성준)가 걸어다닐 때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단을 두드리며 거기에 맞춰 걸었는데, 그 걸음이 태평무 발 딛는 춤이 됐다”며 “춤사위 근본은 경기도 도당굿부터 진쇠ㆍ터벌림 등 까다로운 무속 장단과 다양한 발디딤새를 통해 왕과 왕비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으로 만들었지만 나라 빼앗긴 춤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소망도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고인은 1960년 강선영무용단을 창단, 한국 무용인으로는 처음 참가한 파리 국제민속예술제를 시작으로 시드니 민속무용축제, 세계 민속예술제 참가 등 400여 차례에 걸쳐 한국 무용의 춤사위를 세계 각국에 선보였다.
   2006년에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한국 전통무용으로 처음 공연하는 등 국내외에서 한국무용의 역사를 새로 썼다. 170개국을 돌며 1천회 이상의 공연을 해 한국 무용가 중 가장 많은 나라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한 기록을 세웠다.
   88세이던 2013년에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80년 춤인생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어 제자들과 함께 직접 무대에 오르는 등 고령에도 꺼지지 않는 예술혼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기진맥진할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생전에 "즈려 밟는 장단 마디마디에 대꽃이 핀다."는 말을 들었다. 국민훈장 목련장(1973), 문화예술상(1976) 등을 수상했다.
   강선영 선생은 지난 2016년 1월 21일 오후 8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91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태평무 의상 디자이너인 딸 이남복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5일 오전. 장례는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장으로 치러진다.
                                                            <참고문헌>
  1. “'한국춤의 역사' 강선영 선생 별세”, 매일신문, 2016.1.22일자.
  2. 이윤주, “태평무 강선영 별세…전통춤 마지막 1세대 역사 속으로 170개국서 1000회 이상 공연”, 한국일보, 2016.1.22일자.
  3. 유석재, "태평무의 전설 강선영 별세", 조선일보, 2016.1.23일자. A25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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