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움베르토 에코의 다원주의적 상상력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0.28 02:58

                                                                              움베르토 에코의 다원주의적 상상력

               기호학자ㆍ중세학자이면서 작가였던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거나 그 이념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장 프랑수아 리오 타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의 사상과 생각이 가까웠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서구 사회사상에서 최대의 논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들 수 있다.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시대가 ‘현대’의 세계인가, ‘탈현대’의 세계인가가 논쟁의 핵심을 이뤘다. 전후 최고의 사상가들인 위르겐 하버마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앤서니 기든스, 지그문트 바우만, 움베르토 에코 등이 이 논쟁에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었다.

                                                                                1.  에코의 포스트모더니즘

    이 길지 않은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모두 다루긴 어렵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기호학자이자 중세학자이자 작가인 에코의 담론을 주목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한계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등 에코의 작품들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평가돼 왔다. 이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준 작품은 1980년에 내놓은 첫 번째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장미의 이름’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를 인용해 쓴 구절이다. 진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분명한 것인가, 모호한 것인가. 확실한 것인가, 불확실한 것인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에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성의 한계를 주목하고, 사유의 복수성을 주장하며, 진리의 다원성과 불확실성을 옹호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품은 포스트모더니즘 기반 문제의식은 1980년 펴낸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에 선명하다. 그동안 문학적, 역사학적, 철학적, 기호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시각에서 ‘장미의 이름’이 갖는 복합적 의미망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분석이 이뤄져 왔다. 사회학적 시각은 에코가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하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절정은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장서관에 존재한다는 ‘사실 아닌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학’ 제2권을 에코가 앞세운 것은 비극을 높이 평가한 ‘시학’에 대한 저항 또는 해체를 함축한다. 요컨대, 에코에게 진리란 여럿이며, 그러기에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비극에 대응해 희극을 내세운 에코의 의도는 진리의 절대주의와 단원주의(單元主義)에 맞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부각시키려는 데 있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진리의 복수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탱하는 사상적 지반이다.

    사회이론의 시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논쟁 지형은 모더니즘을 옹호한 하버마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푸코와 데리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절충한 기든스와 바우만과 울리히 벡으로 나누어진다. 에코의 생각은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의 사상에 가까웠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1986년 장 자크 아노가 연출하고 숀 코너리가 주연한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2. 2020년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21세기에 들어와 그 열기가 식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중요했다.

    첫째, 현대사회의 끝없는 내적 분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를 지지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와 문화가 고도로 분화돼 자율성이 증대하는 21세기 사회는 다원주의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다. 지식사회 안에서는 계몽주의적 모더니스트들의 영향력이 컸지만, 지식사회 밖에서는 감성, 욕망, 우연성을 중시하는 탈계몽주의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둘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논쟁과 담론의 중심 이슈가 저성장, 불평등, 포퓰리즘으로 이동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기본적으로 사상과 문화에 관한 것이다. ‘뉴 노멀’ 시대의 도래는 철학과 문화보다 경제와 정치에 대한 토론을 활성화시키고 또 강화시켰다. 주목할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열기가 식었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력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거대 서사’를 해체하고 총체성과 싸우며 ‘동일성’에 맞서 ‘차이’를 중시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은 페미니즘과 에콜로지 등의 ‘정체성의 정치’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중심화보다 분산화가 두드러진 정보사회에 어울리는 철학적ㆍ정치적 상상력을 선사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큰 영향을 미친 영역의 하나가 공론장이다. 21세기 공론장은 ‘포스트트루스(탈진실)’로 특징지어진다. 포스트트루스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뜻한다.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이 포스트트루스의 사상적 후견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목한다. 2018년에 내놓은 ‘포스트트루스’에서 매킨타이어는 말한다.

     “‘객관적인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번째 논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참인 말을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논지가 등장한다. 누군가 어떤 진실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킨타이어가 강조하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오늘날 공론장의 위기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라는 점이다. 포스트트루스가 급부상한 데는 가짜뉴스의 범람이 결정적 계기를 이뤘다. 가짜뉴스는 개인적 감정과 신념에 영향을 미쳐 진실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공론장을 왜곡시킨다. 상대주의가 극단화되면 여론이 파편화돼 결국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공론장의 ‘갈라파고스화’ 경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해체주의라는 독자적 용어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대중적 인기가 많았다. AP 연합뉴스


    2020년대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우리 모두 옳다는 극단적 다원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 다원주의의 경향은 토론에 기반해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주의를 적잖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ㆍ이념적 토대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어느 사회든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또,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에서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현상은 자신 또는 우리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포퓰리즘이다. 이러한 단원주의의 포퓰리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다.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 안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민주주의에 생동감을 선사하는 다원주의적 상상력이 그 빛이라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무질서주의적 상상력은 그 그늘을 이룬다. 무질서주의를 제어하되, 에코가 주장한 다원주의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21세기 민주주의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3. 한국사회와 다원주의적 상상력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토론됐다. 서구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고,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혼성모방 등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활용한 예술 작품들에 대한 관심도 작지 않았다.

20세기 한국 사회는 이념 구도에 따른 ‘이분법 사회’였고, 그건 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조국 사태’로 한국이 둘로 쪼개졌던 지난해 서울 서초동에서는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주장하는 집회(왼쪽 사진)가, 광화문에선 이에 반대하는 집회가 각각 열렸다. 연합뉴스 류효진 기자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다원주의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과 토론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우리 현대사에서 다원주의와 이와 연관된 자유주의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 민주화 과정은 다원주의의 이념적ㆍ사상적 토대보다는 반독재 투쟁이라는 ‘민주 대 반(反)민주’의 구도 위에서 진행됐다. 그 결과가 다름 아닌 이념 구도에 따른 ‘이분법 사회’였다.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이념의 문제로 환원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이들을 ‘종북ㆍ빨갱이ㆍ좌파’ 또는 ‘수구ㆍ꼴통ㆍ우파’로 파악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적ㆍ사회적 현주소였다.

    에코의 다원주의적 상상력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진리는 본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 자신의 생각과 이념만이 옳다는 생각에 기반해 타인의 생각과 이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

    진리가 통약불가능하고 결국 부재한다는 극단적 상대주의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들이라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처음부터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코가 소망한 다원주의적 상상력이야말로 2020년대 우리 사회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가치라고 나는 믿는다.

                                                                                      <학습목표>

    1. 김호기,  "다름을 인정하자… 포퓰리즘 대항마는 포스트모더니즘", 한국일보, 2020.10.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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