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남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전말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0.27 05:00

                                                           전남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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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로부터 암태도로 들어가는 천사대교. 앞에 보이는 것이 암태도이다. 손호철 교수 제공


   전남 신안은 ‘섬들의 천국’이다. 그 섬 중의 하나인 암태도는 이제 다리로 연결되어 배를 탈 필요가 없다. 암태도로 향하는 천사대교(신안의 섬이 1,004개라고 해서 붙인 이름) 위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자, 소설 '암태도'를 쓴 송기숙 선생이 생각났다.
   나는 투옥, 제적 끝에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고 한 언론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5ㆍ18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5ㆍ18이 불순 세력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보도하라는 신군부의 지시에 저항해 제작 거부 운동을 벌이다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끝낸 뒤 귀국해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전남대였고 이곳에서 만난 송 교수는 나의 사표가 됐다. 그는 소설가, 교육자로 성공했으면서도 ‘실천적 지성’으로 5ㆍ18 등으로 여러 번 감옥을 갔다 왔다. 그는 1988년 안종철 김철홍 등 광주 지역의 젊은 사회과학자들을 모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만들어 선구적으로 5ㆍ18 관련 자료를 모았다. 민주화 후 광주시에서 연구 등으로 재정적 보상을 해 주려 하자 “5ㆍ18로 존경받았으면 됐지, 무슨 돈이냐”며 단칼에 거절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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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송기숙 교수의 소설 '암태도'


    송기숙 선생을 생각하는 사이 암태도에 도착했다. 서해안의 섬인 만큼 당연히 염전도 보였지만 소작분쟁지답게 섬치고는 많은 논이 눈에 뜨였다. 조금 달리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공원’이다. 계단을 올라가자 1997년 만든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이 나를 맞았다. 이번 기행으로 많은 곳을 다니며 수많은 기념물을 봤지만 대부분 학살과 패배의 기록들이라 우울하고 답답했는데 이 탑은 흔치 않은 ‘승리의 탑’이라는 점에서 신바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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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농민들의 소작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


    암태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실 친지들의 사유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농지를 일본인 1명과 한국인 2명이 독점하고 있었다. 최대 지주였던 문재철은 친일로 재산을 늘린 자산가로 중추원 직책까지 맡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는 일본 노동자들에게 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쌀값을 낮췄고 지주들은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소작료를 5할에서 7~8할로 인상했다. 이에 1923년 추수를 앞두고 면장을 지냈으며 3ㆍ1운동과 관련해 감옥을 갔다 온 서태석의 주도 아래 농민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소작료를 4할 이하로 낮춰 달라고 요구하면서 추수 거부와 소작료 불납운동을 벌였다. 다른 두 지주는 소작료 인하에 동의했지만, 문재철은 일본 경찰을 동원해 소작료 징수에 나섰다.
    소작민들은 1924년 3월 면민대회를 열고 5월 15일까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겠다고 결의했다. 공권력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문재철은 깡패들을 동원해 귀가하는 농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본토의 언론과 노동단체 등에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송덕비를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 서태석과 농민 50여명이 잡혀갔다. 이 소식을 들은 청년회와 부녀회가 투쟁에 참여했고 소작인들의 투쟁은 주민 전체의 투쟁으로 발전했다. 주민들은 청년회 박복영 회장 주도 아래 다시 면민대회를 열어 농민들이 잡혀 있는 목포로 원정 투쟁을 나가기로 결의했다. 대중교통이 없었기에 주민 400명이 남강나루터에서 삼삼오오 작은 배를 타고 여섯 시간이나 노를 저어 목포로 달려가 경찰서과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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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주민들이 삼삼오오 배를 타고 목포로 원정시위를 떠났던 남강나루터. 손호철 교수 제공


    한 달 뒤에는 600여명이 법원 앞에서 굶어 죽을 것을 각오한 ‘아사동맹’ 단식투쟁을 벌였고 문재철의 집으로 몰려가 시위를 했다. 투쟁이 장기화하고 소작인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다가 전국적으로 여론화하기 시작하자, 놀란 일제는 문재철을 압박해 타협을 하도록 했다. 목포경찰서장실에서 문재철과 박복영이 만나 △소작료는 4할로 하고 지주는 소작회에 2000원을 기부한다 △미납 소작료는 3년 분할 상환한다 △구금 중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양쪽이 고소를 취하한다 △파괴한 송덕비는 소작인회가 복구한다고 합의했다. 어려운 소작투쟁, 그것도 일제의 지원을 받는 친일대지주를 향한 소작투쟁이 암태도 소작인들의 단결과 주민들의 지원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특히 서태석과 박복영 같은 지도자가 있었고 박복영이 1920년부터 야학교육 등을 통해 주민들의 의식을 깨우친 결과다. 4할은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의 소작료보다도 낮은, 대승리였다. 암태도의 승리는 다른 지역으로 번져 가 일련의 소작쟁의로 이어졌고 4할 소작료가 널리 확대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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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소작쟁의를 다룬 당시의 신문. 박천우 전 장안대 교수 제공


    이후의 역사도 주목할 만하다. 문재철은 친일 행각과 악랄한 착취 행위에도 불구하고 1941년 목포에 한 고등학교를 만든 것이 민족교육운동으로 인정받아 199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가 그를 ‘친일파 99인’에 선정하기도 했지만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름이 빠졌다. 1929년 독립자금을 박복영을 통해 몰래 임시정부에 제공한 것을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재철이 세운 학교 출신으로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해 왔고 그의 행적을 잘 아는 교수는 문재철이 독립자금을 줬다는 물증이 없으며, 설사 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기업들이 야당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을 조금은 주듯이 ‘보험’을 든 것으로 본다. 그의 친일행각과 수탈행위를 생각하면 이를 이유로 친일인사에서 제외한 것은 문제가 많다는 비판적 입장이다. 어쨌든 그가 정말 독립자금을 줬다면 소작쟁의 때문에 박복영을 알게 되어 그리 된 것이니, 역설적으로 소작쟁의 덕에 친일명단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역사란 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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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소작쟁의 주도자 소태석

   

    서태석의 삶은 대조적이다. 고소 취하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괘씸죄로 3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석방 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얻어 고향에서 폐인 같은 삶을 살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그가 사랑했던 농민들의 논에서 벼를 움켜쥔 채 시체로 발견됐다.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식민지 아래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일본'이었기에 민족해방운동은 대부분 사회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다행히 1998년 마을사람들이 마을 입구 언덕에 소작쟁의사적비를 세우면서 그 옆에 작은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후 2003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훈장(애국장)이 주어졌고,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암태도 논을 내려다 보고 있는 그의 추모비 앞에 서자 가슴이 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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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오산마을 언덕에 세워진 암태도기념비와 그 옆의 서태석 선생 추모비. 손호철 교수 제공


    “한 자루의 감자들(a sack of potatoes).” 카를 마르크스는 농민을 이같이 표현했다. 똑같이 땀 흘려 일하는 기층민중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공장에서 함께 협업으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달리 농민은 노동 과정 자체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같은 자루에 넣어도 감자들처럼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가 농민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그들이 나폴레옹과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시각과는 달리 멕시코, 중국, 베트남혁명 등 20세기의 중요한 혁명은 대부분 농민들이 일으켰다. 암태도 투쟁에서도 농민들은 ‘한 자루의 감자’들이 아니라 단결된 동지로 승리를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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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에 그려진, 민초들이 함께 줄을 당기는 그림은 단결을 통해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암태도주민들의 연대의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손호철 교수 제공


    요즘 인터넷에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글이 유행이다. 이승만이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야기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코로나19 시대에 맞게 패러디한 글이다. 원래 이 말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주들이 분열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며 만든 말을 이승만이 빌려 온 것으로 독립운동 시절 분열주의적 행태로 비판을 받아 온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습기만 하다. 어쨌든 암태도투쟁은 아무리 힘없는 민초들도 뭉치면 산다는 것을, 뭉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정리해고 등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경쟁 속에서 '각자도생만이 살길이다'라고 생각하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시대에 암태도 정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민초들이야말로,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암태도 투쟁은 가르쳐 주고 있다. 암태도를 떠나며 나는 빌었다. “송기숙 선생님, 어려운 병이지만 불굴의 암태도 투쟁정신으로 빨리 일어나십시오!”

                                                                                         <참고문헌>

   1. 손호철, "한자루의 감자들이 아니었다. 똘똘 뭉쳐 승리한 암태도 소작 쟁의", 한국일보, 2020.10.26일자.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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