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독도의 날 제정 10주년의 역사적 의의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0.25 15:47

                                                                          독도의 날 제정 10주년의 역사적 의의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 의원들의 독도 방문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며 우리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독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2009년 해양수산원이 1951년 일본 총리령으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자국령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발견한 소식이 언론에 대서 특필됐지만 사실 이것이 독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을 부인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영유권은 언제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무인도의 경우 인지(認知)와 실효지배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국제법 전문가들은 말한다. 다시 말해 언제부터 그 무인도를 알고 있었고 실효적으로 지배   했느냐는 것이 판단의 논리적 근간이라는 것이다. 

   맑은 날 독도가 보이기 때문 에 우리 땅?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왜 독도가 한국 영토인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독자는 얼마나 될까. 삼국사기에 독도가 이미 우리 땅이라고 나와 있다고? 그건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3년(AD 512)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고만 나와 있다.
   당시 우산국은 독도가 아닌 울릉도를 말하고 있음은 한.일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우리 입장에서는‘독도는
당연히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신라가 울릉도를 정복했다면 독도도 따라온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솔직히 억지이다. 삼국사기 기록만으로는 독도가 과연 신라시대에 우산국에 편입돼 있었는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도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이런 내용을 잘 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이야기하며‘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하면 일본은 당장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 우리 고지도에서 우산국을 울릉도로 표시한 지도들을 보여줄 것이다.
   안정복이 개인적으로 대마도에 불법으로 넘어가 자신이 조선의 공무원이라는 거짓말을 하며‘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것은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것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나카이사업경영개요(1911). 물개잡이 나카이는 독도를 일본령에 포함시켜 달라는 건의문을 일 정부에 제출했다.

   놀란 군수는 곧바로 강원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 본군(本郡) 소속 독도가 본부 외양 백여리에 있더니…[本郡所屬獨島]” 
   심흥택의 보고는 강원 관찰사를 통해 즉시 상부에 보고되었다. 내부대신은 '독도를 일본 속지(屬地)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며, 아연 실색할 일'이라고 경악해 했고, 참정대신은 1906. 4. 29. 지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인의 領土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니,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한일간 독도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본제국의 일방적인 통보, 그리고 구한말 조정의 경악이 독도분쟁이 보여준 최초 모습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일간 독도분쟁의 시비를 가리는 데 있어 다른 그 어떤 논리와 주장보다도 이 분쟁의 첫 장면이 독도영유권에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일본 시네마현이 독도를 편입하기로 했던 과정이다.

    1904년 2월, 일본의 내무성과 외무성은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한 수산 사업자로부터 건의문을 받게 된다. 나카이는 “다케시마를 일본 자국령에 포함시켜달라”라고 했다.나카이는 독도에 강치(물개)가 많이 서식하고 있음을 알고 독도에서 물개잡이를 하려 했지만 그 섬이 조선의 영토인지, 아니면 일본의 영토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나카이가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수산국(水産局)이 ‘독도는 무주지(無主地)’라고 답변했던 까닭이었다. 나카이는 즉시 일본 내
    아마도 독도를 우리 영토로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의 기록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 정동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무릉이 독도를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울릉도의 딸린 섬에 죽도(竹島)가 있다. 죽도는 항상 보인다. 그러므로 만일 무릉이라는 섬이 이 죽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섬이란 독도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은 날에 독도가 진짜 보일까? 문제는 보이냐 안 보이냐를 가지고 독도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런 주장을‘환상의 섬’이라고 비꼰다. 자신들에게는 안보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독도는 어떻게 우리 땅이라는 근거를 갖고 있을까.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무인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認知)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다시 말해 언제부터 그 무인도를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라는 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보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유리하다. 독도분쟁을 둘러싼 아이러니한 사실은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우리가 반박해야 함에도 거꾸로‘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논리를 일본이 반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도분쟁 최초 모습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1905년 이전까지 일본은 독도를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
   치열했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던 것은 1906년이었다. 그해 3월, 시네마현 관원(官員)들이 예고도 없이 울릉군수 심흥택을 방문한다. 그들은 울릉군수에게‘다케시마(竹島)가 1904년 시네마현 고시(告示)40호로서 일본국 영토에 편입되었다’라는 통보를 했다. 울릉군수 심흥택은 다케시마가 독도(獨島)를 말한다는 사실에 기겁을 했다. 독도는 당시 울릉도의 고기잡이에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
    문무성에 ‘독도 일본령 편입’과 함께 자신에게 독도를 대여해 줄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내무성은 나카이의 건의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각하했다.
   “이 시국에 즈음하여 조선의 영토일지 모르는 황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취하여 여러 외국에게 아국이 조선병탄의 야심이 있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이익은 극히 작은 데 반하여 실행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나카이 요사부로의 사업계획서 中)
    실망한 나카이는 다시 외무성에 건의를 올렸다. 대답은 의외였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중이었고 동해상에 러시아 함대를 감시할 관측소가 필요했다. 독도는 그 최적지였다. 나카이가 1911년 작성한 ‘독도 사업계획서’에는 당시의 정황이 잘 드러난다.
   “당시의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와 상세히 논의하였다. 그는 시국이야말로 그 영토 편입을 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망루를 건축해서 무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상 극히 좋지 않겠는가. 특히 외교상 내무와 같은 고려를 요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속히 원서를 본성에 회부케 해야 한다고 의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해서이 섬은 드디어 우리 영토에 편입된 것이었다.“ (나카이 요사부로의 사업계획서 中)

   울릉도와 독도를 헷갈렸던 일본 이상의 기록들은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이 군사적 목적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04년 당시 일본이 독도를 무주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904년 이전에는 어땠을까. 이 점이 비로소 독도 영유분쟁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일본은 1904년 이전에 독도를 자신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이를 알아보려면 일본 기록에 독도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독도에 관한 일본 기록들 가운데 최초의 것은 1667년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이즈모슈의 관리 사이토호센이 상관의 명령을 받고 1667년 가을에 오키시마를 순시한 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서 <은주시청합기>라는 이름으로 올린 보고서 이다. 신용하 교수는 아래와 같이 풀이한다.
   “은주는 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오끼섬)라고 말한다.[중략] 두 낮 한 밤을 가면 송도가 있다. 또 한 낮 거리에 죽도가 있다. 이 두 개의 섬들은 무인도인데, 이 두 개의 섬들로부터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이즈모슈)에서 은기를 보는 것과 같다.”
    일본은 1870년 대 말까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로 불렀다. 독도(우산도)는 송도(松島·마쓰시마)였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계속됐다. 당시 울릉도는 조선의 공도(空島)정책에 의해 주민들을 모두 내륙으로 옮겼다. 그러니 울릉도를 무인도라고 했던 표현은 정확해 보인다. 문제는 왜 지금 일본이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부르지 않고 울릉도를 일컫던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는가 하는 문제다.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 섬에서 고기잡이나 정박과 같은 실효지배를 했다면 그 명칭을 헷갈리거나 뒤바꿔 쓸 까닭이 있을까?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다. 다름 아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들의 근대항법으로 제작된 지도를 참조하면서 동해안의 알고노트, 리앙쿠르 등으로 표시된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헷갈리기 시작했던 까닭이다. 특히 1854년 러시아 푸틴아틴호가 동해안을 탐사하며 제작된 지도에는 울릉도외 1섬이‘알고노트’라고 기록돼 있고 일본 해군은 여기에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제는 그 섬이 실제 없었다는 것이었고 일본은 그 다케시마라는 명칭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울릉도가 아닌 지금의 독도에 붙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까지 일본이 실제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은 커녕 실효적인 활동조차도 거의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어느 한국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인 우리 조상들의 우매했던 점을 이해해 달라”정도의 떼쓰기밖에 없다. 결정적인 것은 독도가 일본 기록에 등장하는 두 번째 문서다. 1785년 일본의 최고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제작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조선,유구,아이누국)에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를 표기하고 이를 조선의 것(朝鮮ノ持之)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삼국접양지도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고문서다.
    이제 결론을 말해보자. 독도에 관한 한, 韓日 어느 쪽도 독도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에서 자신의 것이라는 주장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은 독도가 등장하는 두 번 째 기록에서 독도를 조선의 것이라고 표기했고 그 전통은 막부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독도에 출항하려는 자국인들에게 항해 면허, 즉 현재로 치자면 출국비자같은 것을 발행했다. 19세기 들어서도 일본은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인지하지 못했고 20세기 일본의 팽창주의는 독도를‘무주지’라는 인식하에서 군사기지로 확보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다케시마, 마쓰시마는 우리말에서 비롯됐을 수도 어떤 일본인들은 묻는다. 그러면 왜 한국에는 독도에 대한 확실한 소유기록이 없냐고. 그 질문은 정말 어리석다. 일본의 어느 기록에 후지산은 일본 것이라는 기록이 있던가. 자기의 영토인지 아닌지 애매할 때 확실한 기록이 등장하는 법이다. 독도는 1900년 대한제국에서 이미 석도(石島)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1905년보다 앞서 그 주권이 선포된 영토다.
   그 섬을 우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무인도, 돌섬을 뜻하는 방언으로‘독섬’이라고 불렀고 남해안에는 그런‘딱섬’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일본은 송(松),죽(竹)의 아름다운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지만 우리는 이미 생활세계에서 투박한 고유어로 이 독도를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일본인들이 들으면 거북할 만한 가설을 하나 제시하고 싶다.
   일본어 마쓰(まつ)의 독법(讀法)에는 松 외에 끝을 뜻하는 末자가 있다. 우리말로는 끝을 뜻하는‘말’이다. 한국에는 서쪽 끝섬 마안도와 남쪽의 끝섬 마라도가 있다. 고유어로는‘막섬’,‘말섬’이다. 그래서 동해안의 끝섬 독도도 아마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울릉도를 오가며 벌채와 고기잡이를 하던 고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발음을 빌려 ‘딱섬’,‘말섬’으로 불렸던 독도를 ‘다케-시마’,‘마쓰-시마’로 불렀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왜이 중요한 두 섬의 이름을 헷갈렸을까.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삼았던 일자무식의 일본 어부들이 松.竹.梅와 같은 고급 어휘를 사용해서 울릉도와 독도를 불렀다는 건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참고문헌>  

   1.  한정석, “독도가 한국 영토인 진짜 이유”, 『미래한국』, 2011.8.1. pp.36-39.

  

시청자 게시판

2,095개(7/105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42646 2018.04.12
1974 조선 내각총라대신 김홍집 살해사건 사진 신상구 416 2023.02.19
1973 <특별기고> 연담 이운규 선생의 후천개벽사상과 남학의거운동 신상구 298 2023.02.19
1972 <특별기고> 2023년 정월대보름 맞이 대동 장승제 봉행을 신상구 220 2023.02.19
1971 주역과 천부경의 대가 대산 김석진 선생 타계를 추모하며 사진 신상구 457 2023.02.19
1970 <특별기고> 운초 계연수 선생의 생애와 업적<실존인믈&g 신상구 671 2022.09.15
1969 한국전통문화대 崔英成 교수, 목은 이색 문집서 ‘天符經’ 언급 발견 사진 신상구 791 2022.09.15
1968 세종시 원로서예가 송암 민복기(松巖 閔復基) 선생 사진 신상구 938 2022.09.06
1967 가난했던 이중섭은 병문안 선물 살 돈 없어 그림 건넸죠 사진 신상구 726 2022.09.01
1966 공덕동 빌딩 숲에 숨어 있는 권력의 쓸쓸함 사진 신상구 592 2022.09.01
1965 백제 ‘은꽃 장식’에 담긴 성왕의 강국건설 의지 사진 신상구 361 2022.08.31
1964 中, 70년 유지 조선족 한글 간판 단속 사진 신상구 346 2022.08.30
1963 지진아 아인슈타인 깨운 3가지...나침판, 바이올린, 토론 사진 신상구 421 2022.08.24
1962 그림자 없는 평등 세상, 장욱진의 이상향 사진 신상구 263 2022.08.24
1961 거문도 사건 전말 사진 신상구 476 2022.08.19
1960 중부권메가시티와 충청문화르네상스 사진 신상구 295 2022.08.18
1959 무속(巫俗)의 허와 실 신상구 523 2022.08.17
1958 위대한 문학은 제도·권력·유행의 경계 밖에서 ‘눈물 닦아주는 손’ 신상구 303 2022.08.17
1957 고려인 최초 정착지에 세운 ‘추모의 벽’, 15人 독립영웅 우뚝 사진 신상구 459 2022.08.17
1956 <특별기고> 8.15광복 77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주요 과제 사진 신상구 329 2022.08.17
1955 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77주년 경축사 전문 신상구 217 202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