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규명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제조건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6.28 12:23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규명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제조건

                                             

1960년 11월13일 경북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경주피학살자유족회가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당시 행사에는 경찰서장·시장·국회의원도 참석했지만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북괴에 이로운 일을 했다”며 유족회 회장인 김하종씨만 잡혀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0년 11월13일 경북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경주피학살자유족회가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당시 행사에는 경찰서장·시장·국회의원도 참석했지만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 직후, “북괴에 이로운 일을 했다”며 유족회 회장인 김하종씨만 잡혀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무덤도 없는 영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전쟁기 학살 사건에 대한 폭로가 봇물 터지듯이 나왔다. 곧이어 대구·경북 각 지역에서 유족들이 집결했을 때 이런 구호가 내걸렸다. 남편을 졸지에 잃은 수백명의 청상과부들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울고 있는 모습은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처연한 현장이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비극, 아니 단군 이래 한반도에 살아온 한국인들끼리 자행한 최대의 살육이 바로 한국전쟁 초기 1년 동안 남한 전역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 사건이었다.

8·15 해방 후 지주와 소작인, 양반과 상민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좌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이 중층적으로 겹쳐 발생했던 폭력적 갈등은 6·25 북한의 남침으로 마치 화약고에 불이 붙은 것처럼 전국에서 상호 살육으로 비화했다. 전쟁의 방아쇠는 북한이 당겼으나, 위기에 몰려 후퇴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의 군과 경찰은 내부의 적이 두려워 남하하면서 전국의 모든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혐의자나 요주의 인물들을 싹 잡아다 죽였다. 그 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이후 군과 경찰과 우익 청년조직은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또다시 무참하게 학살했다.

물론 당시 잠시 남한을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은 지방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우익 가족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북으로 후퇴했다. 지리산, 전남 일대의 산악지역 주민들은 국군의 토벌작전 희생양이 되었고, 호남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인민군이 물러간 이후에도 좌우 주민들 간의 보복적 상호 살육이 계속돼, 전남 영광군의 경우 주민 3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셀 수 없는 성폭력과 재산 탈취도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몰려 한국 사회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산송장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시절 기자회견을 하는 김동춘 교수. 뒤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송기인 위원장(신부)이 앉아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시절 기자회견을 하는 김동춘 교수. 뒤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송기인 위원장(신부)이 앉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군부세력이 내건,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구호는 사실 4·19 혁명 이후 불길처럼 일어난 학살 사건 고발과 보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진상조사 작업에 대한 한국군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쿠데타 직후 그들은 대구·경북·경남 지역에서 시작된 전국 유족회 간부들을 제일 먼저 체포·수감하였고, 제주·거창 등지에서 유족들이 조성해놓은 합장묘를 파헤치고 세워놓은 비석의 글자를 뭉개고 비석을 쪼개서 땅속에 다시 묻었다. 그들에게 학살은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기억이었다.

    유족들은 이후 30여년의 세월 동안 이웃의 배척과 사회의 냉대를 겪어야 했다. 대구·마산 등지에 모였던 유족 중 부모들은 거의 사망했고, 젊은 아내가 할머니가 된 90년대 중반 이후에야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각 지역에서 유족회가 조직되고 언론과 시민사회도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였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운동이 전개됐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과거사법 통과에 적극성을 보였으며, 결국 사건 발생 이후 55년이 지난 2005년에 드디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게 됐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이 조사차 어떤 유족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니, 1960년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조사를 기억하고 있던 할머니는 “40년 만에 전화를 하셨네요라고 원망 섞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반세기 이상의 세월과 민주화라는 정치 변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등장도 대다수 유족들의 입을 열게 하거나 진상규명 신청을 하거나, 억울함을 공개적으로 외치게 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고, 학살의 가해자들이 전쟁 영웅으로 공식화되어 추앙받는 세상에서 이들은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드러냈다가 또다시 탄압의 칼을 맞지 않을까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회원들이 2010년 12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정금자(61·경주)씨가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회원들이 2010년 12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정금자(61·경주)씨가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부르며 울먹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출범 후 1년이라는 짧은 신청 시간, 그리고 홍보 예산이 거의 없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족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당시 상임위원이었던 나는 송기인 위원장(천주교 신부)과 전국 지방자치단체 순회를 하면서 이런 위원회가 출범했으니 주민들에게 신청 홍보를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돌아다녔고, 직원들은 서울역 케이티엑스(KTX)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서 추석 귀성객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줬다. 홍보를 위한 당시 진실화해위원회의 눈물겨운 노력은, 이후 서울의 모든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마다 붙어 있던 ‘6·25 납북자 신고홍보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홍보 활동을 했음에도 유족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당수 지역이나 대도시의 유족들은 과거사 특별법은 물론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던 상당수의 유족들도 후환이 두려워 신청을 기피해 결국 신청자는 1만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이후 약 5년 동안 조사활동을 진행해 새로운 증언과 많은 자료를 확보했다. 또한 민간인 희생과 적대세력 사건 8천여 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여 유족들의 묵은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었다.

    물론 진실화해위원회에 앞서 별도의 특별법이 통과되었던 제주 4·3, 거창산청함양 사건, 노근리 사건에 대한 조사는 이미 진행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특별법은 주로 유족의 신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사전의 배경에 대한 역사적 진실, 가해자나 가해 명령계통, 사건 이후 유족들이 당한 고통, 성폭력과 연좌제 피해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결국 분단과 휴전체제의 제약 속에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 사건 조사는 무덤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최소로 위로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부의 공식 사과, 위령사업 등 최소한의 것은 이행되었으나, 추가 유해 발굴, 보상 혹은 배상, 전국 단위의 위령시설 혹은 평화공원 설립, 작전권을 갖고 있었던 미국과의 추가 협의, 과거사 재단의 설립 등의 권고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2010년 10월, 충남 아산시 아산시민문화복지센터에서 ‘60주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아산지역 합동위령제’가 열려, 참석한 유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날 위령제는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위해 60년 만에 처음 열렸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2010년 10월, 충남 아산시 아산시민문화복지센터에서 ‘60주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아산지역 합동위령제’가 열려, 참석한 유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이날 위령제는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위해 60년 만에 처음 열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아든 유족들은 개별적으로 정부를 향해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법원은 대체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보상 결정을 내렸다. 일부 유족들은 재단을 설립해 추가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일괄 배·보상 조치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리라고 예상되었던 문제들, 즉 진상규명이 불능처리된 유족이나 미신청 유족들의 불만, 앞서 진상조사를 했던 제주 4·3 등의 다른 유족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이 계속 제기됐다. 이명박 정부가 배·보상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이것을 일괄 처리했더라면 이 모든 문제는 훨씬 더 깔끔하게 처리될 수 있었으나, 그들이 위원회 권고를 무시한 결과 매우 불합리한 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난달, 20대 국회 막바지에 과거사법이 통과되어, 곧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바라보게 된 것은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2004년 통과된 법과 달리 이번에 통과된 과거사법은 사망 사건뿐만 아니라 상해·실종 사건까지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동안의 조사 기간과 2년의 신청 기간을 둔 점, 이전 위원회에서 진상규명 불능 처리된 사건도 재조사를 할 수 있게 한 점, 비록 비공개이나 청문회 조항이 들어간 점 등 진일보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난 위원회가 종료되고 10년의 세월이 더 지났기 때문에 가해자나 현장 목격자의 증언 청취는 더 어려워졌고, 정부 자료의 확보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유족 배·보상, 재단 설립 등은 별도의 특별법이 제정돼야 하기 때문에 이후 국회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문제는 단순히 유족들의 민원 해결 사안이 아니다. 아직 학살의 전체적인 그림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피해의 성격과 규모, 가해의 명령계통, 미군의 한국군 지휘 책임, 그리고 이러한 비극을 가져오게 된 남북한 정권의 책임과 정치사회적 조건 등을 모두 고려하고 분석해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이것은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다년간 연구 조사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전쟁의 종식과 남북한 평화체제의 수립을 향한 길에서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는 가장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고, 또한 학살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김동춘,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규명은 ‘한반도 평화체제’ 전제조건이다 ", 한겨레,  2020.6-25일자.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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