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이야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1.01 04:09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이야기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은 조선말기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친 안동김씨 문충공파 11세손으로 태어났지만 남북만주로 돌아다니며 치열한 항일독립운동 끝에 42세의 젊은 나이로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당한 역사의 주역이다. '장군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김두한 전 의원,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이 그의 자손이다.

   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구(舊)안동'과 고려의 태사 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뉘는데 본관과 성은 같아도 완전히 다른 가문이다. 김좌진 장군은 신안동김씨 출신이다.

   신안동김씨 가문에는 안주하는 삶에 만족하지 못한 시대의 풍운아가 유독 많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 조선말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서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명성황후 일파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 김옥균 선생 등이 신안동김씨 출신이다. 김옥균 선생은 김좌진 장군과 혈통상 11촌이다.

   신안동김씨는 고려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별다른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약 60년동안 세도정치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세간에서 신안동김씨를 일컬었던 '금관자(金貫子)가 서말'이라는 말은 매우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나 쓸 수 있던 관자(갓끈을 고정시키는 도구)를 사용한 인물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김좌진 장군의 중시조인 문충공(김상용, 1561-163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그의 외조부 정유길과 동생 상헌은 좌의정을 지냈다.

   문충공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토벌에 공을 세워 승지로 발탁됐지만 1617년 광해군 당시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 벼슬을 버렸다. 1623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 후에는 대사헌, 형조·병조·예조·이조 판서, 우의정을 지낼 정도로 출세했다. 오륜가 5편, 훈계자손가 9편 등이 그가 남긴 작품이다.

   하지만 문충공은 1636년 병자호란때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로 피난했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청나라와의 타협을 반대하며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그의 기상은 훗날 일본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으로 맞선 김좌진 장군의 기상과 사뭇 닮았다.

   문충공의 11세손인 김좌진 장군은 1989년 11월24일 충남 홍성군의 99칸 집에서 명문거족 김형규씨와 이윤식의 딸인 어머니 한산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는 어린시절 동네 아이들과 하인들을 모아놓고 군대놀이와 말타기 연습을 하며 영웅을 꿈꾼 개구쟁이였다. 1905년에는 자신의 집에서 부리던 노비 30명을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종 문서를 불사른 후 논밭을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김 장군의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모친 한산 이씨는 이후 모든 재산을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에게 맡겼고 김좌진 장군은 같은 해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김 장군은 1907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집을 개조해 사립학교인 호명학교를 세운 후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비용으로 충당했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 애국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20살 무렵이던 1909년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세운 후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를 설립, 교감을 맡았고 1911년에는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2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20대 후반이던 1916년에는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시작했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김좌진 장군은 이후 대한정의단에 가담해 군사책임을 맡았으며,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됐다. 1919년 군정부의 이름을 북로군정서로 바꿨고, 1920년 청산리(靑山里)에서 여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 3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 3300여명을 살상, 대승리했다. 

  1922년에는 10여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로 취임했고 1925년 3월 항일독립운동단체 신민부를 창설,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을 맡았다.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군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29년에는 신민부의 후신인 한국총연합회의 주석으로 선임, 계속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30년 1월24일 김좌진 장군은 중동철도선 산시역 앞 자택 주변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향년 42세였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 의송 김두한(1918-1972년)전 의원 역시 시대의 풍운아였다. 김 전 의원은 그 시절 독립운동가의 자녀가 대부분 그랬듯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김 장군과 애첩이었던 기생 김계월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고아나 다름없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일제 말 종로를 중심으로 주먹왕으로 군림하며 일제 무기고를 폭파하고 조선상인을 보호하는 등 협객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김구 등이 주도한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활동에 매진했고, 그 과정에서의 살상행위 때문에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형집행일 직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다.

  1954년 종로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3대민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제6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사카린밀수사건이 논란이 됐을 때 그가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김두한 전 의원의 딸인 김을동 의원이 현재 정치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김 의원은 1945년 서울 출생으로 풍문여고와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고려대 자연자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7년 동아방송 성우로 연기인생을 시작했으며, 이후 KBS 극회 부회장, 한국방송연예인노조 집행위원 등을 거쳤다. 서울시의회 의원, 자민련 중앙당 여성복지특위원장, 성남수정지구당위원장 등을 거쳐 2008년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의 아들 배우 송일국은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김을동 의원은 자신의 조부인 김좌진 장군과 김두한 전 의원에 대해 "아버지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깡통밥을 얻어먹으며 자랐다"며 "국회의원을 2번이나 지냈음에도 대한민국에 김두한이라는 이름으로 재산권이 등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아버지가 생각했던 것은 '어차피 이 집안에 태어난 건 내 몫'이라는 것이었고, 나 역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유혹을 물리친다"며 "자존심을 버리고 이익을 위한다면 (할아버지의 노력이) 1대도 아니고 2대에 걸쳐 무너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문헌>
    1. 박주연,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 일가",  뉴시스,  2011.7.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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