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조선어학회 주필’ 건재 정인승을 만나다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10.27 05:53

                        [가갸날, 우리말 나들이③] ‘조선어학회 주필’ 건재 정인승을 만나다…우리말에 일생을 바친 한글학자의 삶        

  • 조아영 기자
  • 승인 2019.09.05 15:37 

전북 장수군 양악마을에서 태어나 독학한 '소년 훈장'
조선어학회 주필 맡아 '큰사전' 집필 주도한 인물
고향에 기념관과 동상, 유허비 등 조성돼 있어

건재 정인승 선생은 조선어학회 주필을 맡아 <큰사전> 편찬을 주도했고, 평생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한 인물이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건재 정인승 선생은 조선어학회 주필을 맡아 <큰사전> 편찬을 주도했고, 평생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한 인물이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여행스케치=장수]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말이 산산이 흩어지던 때, 조선팔도의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든 이들이 있다. 혹독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한글을 지켜낸 수많은 학자 중 조선어학회 주필을 지내며 <큰사전>을 펴낸 건재 정인승(鄭寅承, 1897~1986) 선생은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세울 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 정인승, <조선어학회 시절>, 《건재 정인승 전집 6》 中

                                                                      덕유산 자락, 장수 양악마을로 향하다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건재 정인승 선생을 만나는 여정은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서 시작한다. 덕유산 남쪽 자락과 토옥동계곡을 끼고 있어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양악마을은 선생의 고향이자 유년기를 보낸 중요한 장소다. 지금은 평화로운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선생이 어렸을 적만 해도 일제가 의병 토벌작전을 벌여 밤이면 총성이 울려 퍼지는 등 모진 기억이 서려 있다. 정인승 선생이 5세 무렵부터 다녔던 서당 또한 의병난리로 인해 문을 닫는다.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 자리한 건재 정인승 기념관. 사진 / 조아영 기자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 자리한 건재 정인승 기념관.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 로비 공간에 전시된 <한글> 110호 출판 기념 사진. 사진 / 조아영 기자<br>
기념관 로비 공간에 전시된 <한글> 110호 출판 기념 사진.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 입구에는 선생이 남긴 말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 입구에는 선생이 남긴 말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양악천을 건너면 곧바로 건재 정인승 기념관에 닿게 된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외부에 우뚝 서 있는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든 채 굳센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우리말을 수호했던 그의 기개가 묻어나는 듯하다. 동상 아래로는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한 자 한 자 새겨 넣은 타일이 깔려 있어 더욱 특별하게 여겨진다.

    원형으로 구성된 기념관에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체험 팸플릿과 스티커가 비치되어 있으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이 시기별로 분류되어 있어 살펴보기 수월하다. 전시 도입부 패널에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 끝에 서울 유학을 떠난 일화와 25살의 나이에 연희전문학교 학생이 되어 학문을 펼쳤던 이야기가 빼곡하게 담겨 있어 선생의 청년기 시절을 살펴볼 수 있다.

건재 정인승 선생. 사진 / 조아영 기자
건재 정인승 선생. 사진 / 조아영 기자
동상 곁에 자리한 유허비와 정자. 사진 / 조아영 기자
동상 곁에 자리한 유허비와 정자. 사진 / 조아영 기자
건재 정인승 선생의 묘비. 경기 모란공원에 모셔졌던 묘소는 2006년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사진 / 조아영 기자<br>
건재 정인승 선생의 묘비. 경기 모란공원에 모셔졌던 묘소는 2006년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장규열 건재 정인승 기념관 관리자는 “이곳 양악마을에서 밤낮없이 책을 읽으며 독학했던 선생은 16~17세 무렵 서당이 있던 자리에 ‘동신학교’라는 소학교를 열기도 했다”라며 “형님뻘, 아저씨뻘 되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국문ㆍ산술ㆍ지리ㆍ역사 등 보통학교 과정을 가르치며 남다른 두각을 보인 것”이라 설명한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영어 교사로 부임한 뒤 개탄스러운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당시 정규 수업 중 일본어 시간은 1주에 6시간이었으나 국어 시간은 1시간에 불과했던 것. 민족 관념을 심어주려면 국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선생은 비공식적으로 국어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후 1936년 <큰사전> 편찬을 시작한 때와 옥고를 치른 시기 등을 제외하면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INFO 건재 정인승 기념관
    기념관이 자리한 계북면은 무주군과 맞닿아 있어 대중교통으로 방문할 경우 장수공용버스터미널을 이용하기보다 무주안성터미널에서 하차하는 것이 좋다.
    관람료 무료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ㆍ화요일, 국경일 휴관)
    주소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길 119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 기념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이 정인승 선생이다. 사진 / 조아영 기자<br>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 기념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이 정인승 선생이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그가 평생 ‘짝귀’로 살아야 했던 이유
    선생의 청년기를 아우르는 도입부를 살펴보고 나면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섹션이 나타난다. 바로 1942년 우리의 말과 글을 모아 <큰사전> 편찬을 준비할 당시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기 때문이다. 함흥 형무소에서 하루 온종일 무릎을 꿇고 지내야 했던 선생의 모습이 디오라마로 재현되어 있으며, 함께 옥고를 치렀던 동지들과 남긴 흑백사진도 살펴볼 수 있다. 

   ‘단단한 고무방망이가 냅다 등줄기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대뜸 얼을 빼놓고 나더니 취조형사가 ‘너희들이 조선어사전을 만든다지? 왜 그런 걸 만들지?’하고 캐물었다. (…) 그들이 어찌나 오른손으로 얼굴을 때려 댔던지 나의 왼쪽 눈과 귀는 통통 부어 있었다.‘ - 정인승, <함흥 감옥 생활>, 《건재 정인승 전집 6》 中

    당시 상황에 대해 기록한 선생의 글을 살펴보면 일제의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은 이때 당한 심한 고문으로 인해 왼쪽 귀가 변형되었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새도 없이 그대로 굳어버려 평생 짝귀로 살아야만 했다. 일제가 몸과 정신을 짓이기는 와중에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은 변함이 없었고, 광복 직후부터 <큰사전>의 편찬 작업을 이어간다. 

유치장에서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채 지내야했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사진 / 조아영 기자<br>
유치장에서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채 지내야했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사진 / 조아영 기자
안경과 담뱃갑에 썼던 원고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br>
안경과 담뱃갑에 썼던 원고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선생이 받은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br>
선생이 받은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장규열 관리자는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 속 ‘류정환(윤계상 분)’을 통해서도 정인승 선생의 대쪽 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다”라며 ”주인공 캐릭터는 실제 모델을 특정 짓기보다 선생을 비롯해 학회 대표였던 이극로 선생 등 회원들의 다양한 성정과 일화를 반영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조선어학회 사건 섹션을 지나면 정인승 선생이 편찬을 주재한 지 꼬박 21년 만인 1957년 한글날 완간된 <큰사전> 실물 책 6권을 살펴볼 수 있다. 1, 2권을 발간할 당시 책명은 <조선말 큰사전>이며 지은이도 조선어학회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3권을 발간하면서부터 지은이는 한글학회로, 명칭은 <큰사전>으로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놀이를 통해 한글 관련 학습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터치스크린을 누르면 헷갈리기 쉬운 맞춤법과 생소한 단어 뜻을 알아맞히는 퀴즈가 제공돼 미처 몰랐던 우리말을 흥미롭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첫 종합 국어사전으로 평가받는 <큰사전>. 사진 / 조아영 기자
우리나라의 첫 종합 국어사전으로 평가받는 <큰사전>. 사진 / 조아영 기자
TIP <큰사전>
    우리나라 첫 종합 국어사전으로 평가되는 사전. 순우리말과 한자어ㆍ외래어ㆍ관용어ㆍ전문어 등 표제어 16만4125개가 실렸으며 국어학뿐 아니라 민족운동사 측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일부 도서관과 한글학회 등에만 보관돼 일반 대중이 열람하기 어려웠으나 2016년 한글날 570돌을 맞아 한글학회 누리집에 PDF 파일로 공개됐다. 이에 총 6권, 3558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우리말 뜻풀이를 인터넷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서울에서 헤아려보는 선생과 조선어학회의 자취 


    한편, 영화 <말모이>에서 분실한 줄로만 알았던 2만6500여 장의 초고를 찾은 곳이 궁금하다면 서울역으로 향해보자. 경성역(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한 원고는 이후 사전 편찬에 큰 힘을 실어준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무척 고맙고 뜻깊은 공간이기에 함께 둘러보기 권한다.

    2004년 폐쇄되었던 구 역사는 원형복원 공사를 거쳐 2011년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로 다시 시민의 품에 안겼다. 현재는 복원된 역사 내부를 자유롭게 살펴보며 100년 전 시간을 헤아려볼 수 있다. 

<큰사전> 원고를 찾았던 서울역 구 역사는 2011년 ‘문화역서울 284’로 거듭났다. 사진 / 조아영 기자<br>
<큰사전> 원고를 찾았던 서울역 구 역사는 2011년 ‘문화역서울 284’로 거듭났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사진 / 조아영 기자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사진 / 조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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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승 선생을 비롯해 우리말과 글을 수호했던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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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공원 입구에는 국민이 직접 쓴 한글을 돌에 새긴 한글글자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서울역을 벗어나 북쪽 종로 방향으로 향하면 정인승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광화문 광장 좌측, 세종대왕 동상을 기준으로 우측에 자리한 세종로공원을 파고들면 2014년에 세워진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하늘 높게 치솟은 탑 곁에는 정인승 선생을 비롯해 우리말과 글을 수호했던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하나하나 눈으로 어루만지며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세종로공원에서 북촌 방향으로 약 20분 정도 걸어가면 조선어학회 회관이 있던 터를 만날 수 있다. 정인승 선생이 성북구 돈암동에서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밤을 지새웠던 당시 건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곳이 지닌 의미를 알리는 작은 표석이 치열했던 시대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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