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인 김병로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4.26 03:22

                                                                                가인 김병로의 생애와 업적

    김병로(金炳魯)는 1887년 12월 15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 사이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인 1899년 담양 정씨와 혼인하였다.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17세 때인 1903년에는 한말의 유학자 전우(田愚)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에 담양(潭陽)의 일신 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배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에 창평(昌平)의 창흥 학교(昌興學校)에 입학하였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니면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폐결핵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에는 주오 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유학생 시절에는 당시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하고 있던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성 법률 전문학교(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인 경성 전수 학교(京城專修學校)와 보성 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인 보성 법률 상업 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을 강의하였다. 또한 1919년부터 경성 지방 법원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주로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무료로 변론하였다. 특히 1923년에는 허헌(許獻)·김용무(金用茂)·김태영(金泰榮)·이승우(李升雨) 등과 형사 변호 공동 연구회(刑事辯護共同硏究會)를 설립하였다. 연구 단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 전선을 형성, 법정 투쟁을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후원 단체였다.
   1930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김병로가 맡았던 주요 사건으로는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 독립운동자에 대한 사건으로 정의부(正義府)·연통제(聯通制)·광복단(光復團)·김상옥(金相玉) 사건, 3·1 운동에 잇따른 각지의 독립 만세 사건,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 운동, 원산 노조 파업 사건, 조선 공산당 사건과 간도 공산당 사건 등이 있었다.
   1927년 2월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 협동 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929년 7월 1일의 전국 복대표 대회(全國複代表大會)에서 조사부장 겸 회계로 선출되어 활약했으며, 1930년에는 중앙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 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광복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당시 김병로가 거주하던 곳이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731번지이다.
   광복이 되자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에는 남조선 과도 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법원장으로, 1953년에는 제2대 대법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 70세의 나이로 정년퇴임하였다. 이후로도 재야 법조인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 자유 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 최고 위원, ‘국민의 당’ 대표 최고 위원 등으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9년 3개월 동안의 대법원장 재임 기간, 김병로는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외압과 6·25 전쟁 등의 격변하는 정치·사회적 격동 속에서 입법부마저 정권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 상황에서도 정권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법부뿐임을 강조하며 이승만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고려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1월 13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 김병로의 공을 기리어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도봉구는 일제 강점기 특히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은거하던 지역이었다. 김병로 외에도 송진우(宋鎭禹)·정인보(鄭寅普)·홍명희(洪命憙) 등이 그들이다. 도봉구에서는 도봉 역사 문화길 일곱 코스를 지정하였는데, 그 중 제7코스가 도봉 현대사 인물길이다. 이 코스는 창동역과 창동 초등학교를 거쳐 벽초 홍명희 옛 집터→고하 송진우 옛 집터→ 가인 김병로 옛 집터→ 위당 정인보 옛 집터→ 영화배우 문예봉 옛 집터를 지나 현대의 사회 운동가인 함석헌 선생 옛집→ 전태일 열사 옛 집터→ 계훈제 선생 옛 집터→ 김수영 시인 옛 본가로 하여 도봉역으로 오는 코스이다.
                                                                                         <참고문헌>
   1. 김학준, 『가인 김병로 평전-민족주의적 법률가, 정치가의 생애』, 민음사, 2001.
   2. 최종고, 『가인 김병로』, 문화체육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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