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병조호란 당시의 외교 난맥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0.03.17 15:09

                                                                           병조호란 당시의 외교 난맥상

    1619년 1월 조선은 만주에서 발흥한 후금을 응징하기 위해 정예군 2만명을 파병했다. 명나라 황제 요청이었다. '도료군(渡遼軍: 요동 파견부대)'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조선 국왕 광해군은 사령관 강홍립에게 전문을 보냈다. "당신의 병사들은 조선 최정예 1만 명이다.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쓰라."(1619년 2월 3일 '광해군일기')   최정예군을 이끈 야전사령관에게 필승이 아니라 패하지나 말라니, 이상하다. 전날 편지에 이유가 적혀 있다. "오랑캐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적은 조선군이 이미 저들 국경 내에 들어간 사실을 알 것이 분명하다. 이후로 원한을 돋우는 화는 필시 깊어질 것이다."(1619년 2월 2일 '광해군일기') 훗날 화를 대비해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라는 뜻이었다. 과연 강홍립 부대는 작은 승전과 큰 패전 끝에 "부득이한 참전임을 너희가 모르느냐"라며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다.(이긍익, '연려실기술'21, '심하의 전쟁') 포로 가운데 박난영이라는 사내도 있었다. 무장(武將) 박난영, 파란만장한 외교관 생활이 시작됐다.  
    충청도 면천군수 시절 박난영은 거칠었다. 그때 온양 사는 몇 사람이 반란을 꾀했는데, 진압 과정에서 박난영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자비하게 다루어 논란을 빚었다.(1602년 9월 7일 '선조실록') 그런데 이후 무관직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사람이 돌변했다. 1606년 함경도 함흥 감영 성곽 공사 때 박난영은 전심전력으로 모두 방도에 알맞게 하였으므로 민정을 거스르지 않았다. 함경감사 이시발은 '이 큰 역사를 끝마치는 수개월 동안 원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던 것은 모두 박난영의 힘'이라고 보고했다.(1606년 11월 2일 '선조실록') 왕좌를 이은 광해군은 박난영을 창성부사로 임명했다.(1618년 7월 26일 '광해군일기') '행실이 금수 같아서 사람대접 못 받는 자'라는 사헌부 평가는 무시됐다. 박난영은 평안도 북단 압록강을 낀 군사지역 지휘관이 되었다.  
    1618년 명나라 조정에서 후금을 함께 치자는 요청이 내려왔다. 명나라는 봄볕 만난 얼음장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후금은 빗줄기 만난 죽순처럼 시퍼렇게 솟구치고 있었다. 1619년 광해군은 강홍립을 출정시키며 '싸우는 척만 하라'고 명을 내렸다. 박난영 또한 그 부대 소속으로 전투하다가 생포됐다.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냈다. 4년 뒤 정묘호란이 터졌다. 후금은 생포한 강홍립과 박난영을 협상단에 끼워넣었다. 두 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전쟁은 종료됐다. 이듬해 비변사는 박난영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10년이 되도록 절개를 잊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627년 2월 1일 '인조실록')   이후 박난영은 외교관이 되었다. 때로는 회답관(回答官)으로, 때로는 추신사(秋信使), 춘신사로 선위사(宣慰使)와 선유사로 후금과 조선을 오가며 협상을 담당했다. 그때 후금 수도 심양에는 인조 동생이 살고 있었다. 인질이었다. 왕제(王弟) 이름은 원창군 이구(李玖)다.  
    정묘호란 종전 때 후금은 조선 왕자 한 명을 볼모로 요구했다. 인조는 원창부령 이구(李玖)에게 급히 왕제(王弟) 원창군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은수저, 은병, 은잔을 바리바리 싸주며 대신 볼모로 가라고 명했다. '부령'은 종5품으로 이름만 있는 종실이다. 두 달 뒤 '조선 국왕 이종(인조의 이름)'은 "원창군 이구를 왕제라 칭하여 오랑캐에게 보냈다"며 "천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 애처롭게 여기시라"고 보고했다.(1627년 4월 1일 '인조실록') 원창군은 심양으로 가서 왕의 동생 노릇을 톡톡히 했다. 가끔 조선에 돌아와 후금 정세를 보고하기도 했다.   나라는 파란만장했다. 조선을 치자는 후금 장수들에게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귀영개(貴永介)는 "조선은 구구히 예의를 지키는 쇠약한 나라이니 명을 치면 어차피 우리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정태제, '국당배어·菊堂俳語') 하지만 대세는 전쟁이었다. 주전파인 용골대, 마부대를 따라 동생이자 황제 홍타이지는 전쟁을 택했다. 1636년 12월(양력 1637년 1월) 터진 병자호란이다.
    1636년 겨울 압록강을 건넌 후금 군사가 서울 홍제동까지 밀려오자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도주했다. 왕제가 나와서 휴전 협상에 임하라는 후금 요구에, 10년 전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인조 정권은 가짜 왕자와 가짜 대신을 앞세웠다. 가짜 대신으로 나섰던 형조참판 심집은 "충과 신을 신조로 삼는 사대부라 거짓말할 수 없다"며 왕제도, 자기도 다 가짜라고 말했다. 꼼수에 경악한 후금 부대는 포로로 잡혔던 외교관 박난영의 목을 벴다. 인조 정권은 사진 속 우익문으로 출성해 삼전도 들판에서 항복 의식을 치렀다. /박종인 기자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금 부대는 14일 한양 북쪽 홍제원까지 들이닥쳤다.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됐다. 남대문으로 막 빠져나갔던 인조는 돌아와 문루에 걸터앉았다.(나만갑, '병자록') 길에 가득 찬 도성 남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인조는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屍口門)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두 달 남짓 산성에서 벌어진 일들은 바보가 각본을 쓰고 천치가 연출한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 시초는 농성(籠城) 이틀 뒤 벌어진 두 번째 가짜 왕제 사건이었다. 12월 16일 후금 부대가 산성을 포위한 날이었다.
   15일 적진에 갔던 최명길은 후금 선봉장 마부대가 왕의 동생과 대신을 원한다고 전했다. 정묘호란 때처럼 왕제를 인질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논의 끝에 인조와 관료들이 내린 결론은 딱 10년 전 정묘호란 때 써먹었던 그 꼼수였다. '능봉수(綾峯守) 이칭을 왕의 아우라 칭하고, 형조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보낸다'였다.(1636년 12월 15일 '인조실록') 10년 전 거짓 동생 노릇을 했던 원창군이 무탈하게 지냈으니, 이번에도 써먹자는 것이다.
   인조는 즉시 먼 왕실 친척 능봉수 이칭에게 능봉군 군호를 내려 동생으로 삼았다. 다음날 순식간에 왕제가 된 이칭은 역시 고속 승진한 심집과 함께 산성을 내려갔다. 후금 진영에서 적장 마부대가 말했다.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정묘년 왕제 원창군이 가짜였음을 후금은 알고 있었다.
   숨도 못 쉬고 있는 협상단에게 마부대가 단도직입으로 대신 심집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 그대는 진짜인가?"(1636년 12월 16일 '인조실록') 실록에는 심집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병자록'은 다르다.  
   '심집이 적진에 나가서 말했다. "나는 평생 충과 신을 말했다. 비록 오랑캐라도 속일 수 없다." 그러며 마부대에게 말했다. "나는 대신이 아니며 능봉군은 종실 사람이지 왕제가 아니다." 놀란 능봉군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실제 대신이고, 나는 진짜 왕제다."'('병자록')   심양으로 가던 길에 포로로 잡혀왔던 외교관 박난영과 박노가 그 자리에 있었다. 마부대가 박난영에게 물었다. "누구 말이 맞는가?" 박난영이 답했다. "능봉의 말이 옳다." 뒤에 마부대가 자기가 속은 줄 알고서 박난영이 거짓말을 했다 하여 목을 베어 죽였다. 꼼수가 꼼수를 불러 노련한 외교관 한 명이 목숨을 그렇게 잃고 말았다. 마부대는 "왕제가 아니라 왕자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능봉군과 심집을 돌려보냈다.
    그날 밤 세 정승과 다른 관료들이 동궁(東宮: 왕자)을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 부르자고 건의했다. 그러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맹세컨대 저런 자들과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고 고함질렀다. 협상은 완전 결렬됐다.
    결국 인조는 47일 만에 산성에서 내려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1639년 12월 조선 정부는 청 황실 요구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다. 지금은 '삼전도비'라 한다.
   박난영은 인조가 항복하고도 두 달 넘도록 시신을 찾지 못했다. 세 아들이 울부짖으며 산성 밑을 돌아다니다 4월 13일에 겨우 찾았다. 찾았으되 뼈를 수습할 방도가 없어서 울고만 있었다. 인조는 경비를 보조해주고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라 명했다.(1637년 4월 18일 '승정원일기')
   세월이 흘러 1675년 숙종 때 박난영의 고향에 정려문을 세웠다. 명분은 '오랑캐를 꾸짖으며 죽은 충신'이었다.(1675년 9월 27일 '숙종실록') 그리고 1876년 11월 고종은 그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화친을 유도한 외교관은 간 곳 없고, '오랑캐를 탓한 충신' 이미지를 조선은 망국 때까지 기린 것이다.                    
                                                                                        <참고문헌>
   1. 박종인, “[박종인의 땅의 歷史] 또 가짜 왕제를 보냈으니, 아랫것 박난영 목을 벤다! : 노련한 외교관 박난영의 어이없는 죽음과 병자호란”, 조선일보, 2020.3.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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