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천재 민족시인 백석 이야기 글쓴이 localhi 날짜 2015.12.17 23:52

                                                                             천재 민족시인 백석 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천재시인 백석 시인과 기생 김영한의 못 다한 사랑 이야기는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엄동설한에 듣고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시인 백석의 애인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은 1912년 서울 출생으로 가난에 밀려 기방에서 청춘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김영한은 기생으로 생활하면서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했고, 40대 후반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로 학구적인 인텔리 신여성이었다. 김영한이 함흥 권번에서 '진향(金眞香)'이라는 기생으로 살아갈 때인 1936년 가을에 당시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 만나 3년 간 사랑에 빠졌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 근무할 때에 진향이 읽던『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을 읽고 감동을 받아 진양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붙여주었다. 백석이 부모님의 반대로 자야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떠나간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이 갈리면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백석은 고향인 정주에서 자야는 서울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한(恨)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다. 자야는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백석이 자신을 위해 읊은 싯구절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짧았던 사랑을 회고하며 백석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기생 김영한은 백석과 헤어진 후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을 차렸다. 제3공화국 시절 당시 대원각은 기생관광, 요정정치의 본산으로 술, 여자, 섹스 등 세속적 욕망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김영한은 한국 화류계의 대모로 통하는 바람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김영한은 1980년대 후반에 법정스님의 저서인『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법정스님과 만나 10여 년 간 교류하다가 불심이 깊어져 인생의 말년인 1990년대 후반에 법정스님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시가 1,000억 원 상당의 최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시주하며 무소유를 실천했다. 법정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함께 108범주 한 벌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 때 기자들이 아깝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김영한은 “그이(백석)의 시 한 줄 값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백석에 대한 회고록인『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1989),『내 사랑 백석』(1995) 등 두 권의 단행본을 발간하는 한편, 1997년에는 창작과 비평사에 사재 2억을 기증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스님 김영한은 2년 뒤인 1999년 84세의 나이로 염주를 목에 걸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할 때 상재한 시집인『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바로 백석 시인과 기생 김영한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낭만적인 서정시집이다. “지금 눈이 내리는 것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읊었던 백석의 명시는 당시 연인들의 연가가 되어 버렸다.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한 화류계 여인이었던 김영한의 아무런 조건 없는 시주로 인해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로 바뀌어 수많은 중생을 구제할 불교의 도량으로 쓰이고 있다. 길상사는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극락전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길상사 극락전 서편 실개천 건너에는 ‘길상화 김영한 여사 공덕비’가 애처로운 세월을 무심히 지키고 서 있다.
   백석 시인이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서 일평생 시를 썼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회자될 정도로 백석 시인은 한국 문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백석이 1936년에 상재한 첫 시집 <사슴>은 100부밖에 찍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 희귀본으로 꼽힌다. 1936년 1월 출간 당시 시집의 가격은 2원이었는데, 지난 2014년 11월 19일 진행된 경매에서 5500만 원으로 입찰이 시작돼 7000만 원에 낙찰됐다. 그리하여 가격이 79년 만에 무려 3500배나 폭등했다.  
   백석은 신구(新舊) 지식을 섭렵한 천재 문인이었다. 19살에 이미 ‘그 모(母)와 아들’이란 단편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 배운 한문을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그리고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겼으며 말을 잘 하고 유우머 감각이 뛰어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그는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석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그는 오산보통학교와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오산고보 시절 고당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선배 시인 김소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그러다가 고향 부자 방응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사의 장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전문부 사범과(영문과)에 입학했다. 최우등으로 학업을 마친 백석은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같은 해 <조선일보>에 산문「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임종 체홉의 6월」,「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에 단편「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하고,『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35편의 시를 묶어 100부 한정판으로 시집 <사슴>을 조광인쇄주식회사에서 발간하면서 일약 문단의 총아로 등장했다.
   백석의 첫시집 <사슴>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담은 명시집이다. 한편 <사슴>은 도시문명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다. 시인은 일제가 근대화를 운위하며 숨통마저 끊어버리려 했던 한국의 가치와 전통을 되새기고 그 부활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고 찬탄했고, 시인 박용철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고 호평하였다.
   1935년 6월, 경성의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스물네 살의 백석은 통영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을 만나 짝사랑을 하였다. 북방 출신이었던 백석에게 해풍을 머금고 자란 란은 무척 이국적인 소녀로 보였다. 시인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백석은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3번이나 직접 방문했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시를 지어 <통영>이란 제목의 시가 세편이나 있다. 란을 보고 한눈에 반했던 백석은 불행히도 그녀에게 자신의 뜨거운 속내를 고백하지도 못했다. 사실 란은 친구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던 걸까. 1936년에 25세였던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 선생으로 부임했다.
   통영 출신의 이화여고생 난(蘭)에 대한 짝사랑의 기억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함흥에서 조선권번 출신의 기생 자야를 선생들의 회식자리에서 만났다. 궁중무용을 포함한 가무에 능했던 당시 21세의 미인 자야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백석은 함흥에서 그녀와 3년이나 동거를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자야와의 동거 생활은 계속 불안하기만 했다. 동거 기간 중 부모의 강권으로 두 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백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버리고, 다시 자야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도 강해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백석은 1939년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백석의 장래를 걱정했던 자야로서는 그의 의견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28세의 민족시인 백석은 그해 늦가을, 싸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만주로 가는 기차에 홀로 몸을 실었다.
   그 후 백석은『인문평론』에 <팔원>(1939)을, 『문장』에 <두보와 이백같이>(1941) 등을 발표했고, 1940년에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테스』를 번역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백석 시인이 북한에 남아서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1947년에는『학풍』에 <적막강산>을 발표했고, 1957년에는『아동문학』에 <멧돼지> 등 동시를 발표했으며, 1958년에는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백석은 문학잡지에 수많은 시와 수필과 야화 등을 발표했다.  
   백석의 문학 세계는 순수 모국어를 통한 토속적인 북방정서와 민중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민족의 영혼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수호 보존하고 모국어로 민족적 삶을 담아내는 것을 백석 자신은 시인의 사명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서양 외국어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백석 시인은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많이 발표했는데,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백석 시인을 가리켜 한국 현대문학 한 세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민중의 가슴 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한 시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남북한으로 분단되자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는 생이별을 하여 백석은 고향인 정주에서 자야는 서울에서 서로 그리워하며 한(恨)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백석의 문학작품들은 국토 분단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념의 덫에 걸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7년에 해금이 되자 창작과 비평사에서『백석 시 전집』(1987)이 간행된 이후『가즈랑집 할머니』(1988),『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 소리』(1991)가 시 선집으로 간행된 바 있다. 그러자 백석은 일순간 최고로 사랑 받는 시인으로 떠올라 한국 문단에서 샛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1. “백석(白石)”, 네이버 지식백과, 2015.12.16.
   2. 낭산 이기순, “토속어와 고향의식의 천재시인 백석(白石)”, 문학기행, 2013.10.1.  
   3. 신상구, “대전을 중심으로 고서 나뭄문화 확산”, 충청투데이, 2014.12.10일자. 20면.
   4. 백승종, “시인 백석 - 식민지 근대화는 제국주의 가면...전통 살아있는 근대를 소망했다”, 한국일보, 2015.12.14일자. 25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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